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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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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1861 ∼ 1908)
내용   인물 이미지 없음 이강년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1861년(철종 12) 문경에서 이기태(李起台)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운강(雲岡)이다. 어려서부터 장대같은 큰 키며 봉의 눈에 칼날같은 눈썹, 붉은 얼굴빛, 쇳소리가 나는 우렁찬 말소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예감케 하였다.
그의 가문은 김자점의 외척으로 김자점이 벼슬에 있을 때는 번성하였으나 인조때 김자점이 역모죄로 형을 받게 되자 화를 피하여 안동의 심천으로 낙향한 후 대대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유학과 충효의 도덕을 닦는데만 힘썼다.
성장하면서 그는 유학에만 전념하는 선대의 뜻에 연연하지 않았는데 나날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가만히 앉아서 볼 수만은 없어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젊음을 바쳐 공을 세우려 하였으나 1884년(고종 21) 10월 사대파인 수구당과 혁신파인 개화당 사이에 일어난 정친적 변란인 갑신 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그는 분개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있는 사이에 개화당 김옥균의 삼일천하(三日天下) 는 실패로 돌아갔고 국운은 점점 기울 무렵인 1894년(고종 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불타는 혈기를 가진 그는 쇠약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동학에 뛰어들어 문경의 동학군을 지휘하여 왜병과 싸우며 한편으로 농민을 못살게 구는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 후 잔악한 일제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1895년(고종 32) 10월 국모인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말았다.
한편 조정에서는 단발령을 내리는 등 세상이 어지러웠다.
이에 분개한 이강년은 가산을 다 털어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왜적의 편을 들면서 갖은 포악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던 안동 관찰사 김석중과 순검 이호윤, 김인담 등을 붙잡아
"이 자들은 적의 앞잡이로서 백성들을 괴롭힌 자이다.
이 자들을 처단하여 역적들의 말로가 어떠하다는 것을 만백성에게 보이겠다."
하며 목을 베어 장대에 매달았다.
그 후 제천으로 유인석을 찾아가니 유인석은 그를 등용하여 유격장으로 삼고 군사 1백여 명을 주어 충주 수안보에 있는 적의 병참을 치게 하였다.
이어 문경으로 진군하여 조령의 세 관문을 차단하여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치고 총기 탄환 60여 상자를 빼았았다.
그 후 다시 제천으로 진군하여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패하자 더이상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단양으로 후퇴하여 남은 군사를 이끌고 유격활동을 하였으나 형세가 약화되어 더 전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영춘 소백산으로 들어가 의군을 해산하고 말았다.
그 후 단양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면서도 날로 곤경에 빠지는 백성들 생각에 한시각도 근심을 놓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적의 습격을 받고 손수 칼을 들고 적과 싸웠으나 다수의 적을 막을 수 없어 얼굴과 팔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