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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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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1641∼1721)
내용  

권상하는 조선 중기 실학운동이 일어날 무렵, 유명무실해가던 성리학의 이론을 새로운 방향으로 불러일으켜 조선후기 유학 발전의 바탕을 마련한 사람이다. 점잖고 너그러운 인품으로 81세까지 장수하는 동안 당시 정계와 학계에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면서도 끝까지 벼슬을 외면한 사람으로 이름나 있기도 하다.

그는 1641년(인조 19) 5월 28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의 묘소는 충북의 충주시 동량면 선동리 산 29번지에 있고, 제천시 한수면이 바로 '수암'과 '한수재'라는 그의 두 가지 호 중 '한수재'의 유래이며, '한수재'라는 현판이 걸린 그가 살던 집이 1983년 충주댐 건설로 수몰됨에 이르자 한수면 송계리로 옮겨 복원함으로써 그의 얼을 기리고 있으니 그는 충북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살아 생전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 스승의 학통을 이어받아 계승한 학자인데 우암과는 각별한 사이로 '수암', '한수재' 둘 다 송시열이 지어준 호라하며, 특히 송계리에 복원한 '한수재'현판은 우암 자신이 직접 썼다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가장 큰 인물이 될 바탕이 보였다 하는데, 1660년(현종 1) 그의 나이 21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했고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리하여 그는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우암 선생을 찾아갔고, 25세 때에는 동춘 송준길을 찾아가 공부 했다. 그리고는 28세 때 정시에 응시했는데, 그 때 그가 쓴 시가 어찌나 우수했던지 그 시를 본 시험관이, 이것은 틀림없이 다른 시험관이 시제를 귀뜸해 주어 미리 준비 했던 것이라 의심하고 낙방을 시켰다가 곧 그가 쓴 것임이 밝혀지자 대단히 애석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식을 들은 그는 운명이라 여기고 원망도 낙심도 하지 않고 의연했다는 것이다. 그해 부인 이씨가 세상을 떠나고, 31세 때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는데 모두 선산이 있는 제천 청풍의 황강 옆에 장사지내고, 이때 그는 선대의 고향이고 부인과 부친이 묻혀 있는 이곳, 즉 지금의 한수면 황강리로 낙향해서 살 것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리고 3년 후 그가 34세가 되던 1675년(숙종 즉위년)에 스승인 우암이 벼슬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내력은 대략 이러하다.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의 계모인 조씨(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느냐하는 이른바 복제문제가 일어났는데, 이때 우암이 효종은 둘째아들이니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하여 그렇게 했다. 그런데 현종 15년엔 효종의 왕비요,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예조에서 이번에도 전례에 따라 1년복으로 하자는 바람에 현종의 노여움을 사 처음에 1년복을 주장했던 우암에게 책임을 물어 그 제자들을 몰아냈다. 그런데 갑자기 현종이 별세하여 숙종이 왕위에 오르더니 선왕인 현종의 묘비문을 우암에게 지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우암은 이미 선왕에게 죄를 지은 몸이므로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비문을 쓰지 않았다. 이에 숙종도 노하여 반대파인 남인들이 들고 일어나 급기야 덕원으로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이것을 본 권상하는 정치, 벼슬에 환멸을 느끼고 가족을 이끌고 청풍황강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우암을 자주 찾아가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귀양살이 5년만에 우암이 풀려나자 그는 우암이 거처하는 화양으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며 유학에 몰두하니 우암이 기뻐하며 "내 한 도인을 얻었노라"하고 제자 권상하가 거처하는 방을 '수암'이라 부르고 또한 '한수재'라 이름하였다. 그의 호는 바로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한수재'는 우암이 존경하는 주자의 감홍시에서 땄다고 한다.

1689년(숙종 15)에 송시열이 또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번엔 세자 책봉문제 때문이었다. 숙종의 비인 민씨에게 소생이 없던 차 후궁 장씨가 아들을 낳으니 숙종이 기쁜 나머지 장씨를 희빈으로 봉하고 어린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우암이 이를 반대했다. 이에 또 숙종이 크게 노하고 반대파들도 몰아부쳐 급기야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스승의 신변이 심상치 않을 것을 예상한 권상하는 제주로 달려가 이별을 고하고 스승의 서적, 유품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6월, 우암의 죄를 다시 묻기로 하고 숙종이 우암을 서울로 압송해 오도록 했다. 그러나 반대파인 남인과 서인의 소론파가 우암이 풀려날 것을 우려하여 그의 죄상을 탄핵하는 바람에 도중에 사약을 내리도록 번복했다. 그때는 우암이 정읍까지 왔을 때였다. 이 소식을 들은 권상하는 정읍 으로 달려가 스승을 맞이했다. 제자 권상하를 본 우암이 그의 손을 잡았다.

"나는 일찍이 학문을 하다 죽을 근본으로 삼았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고 죽으니 자네는 이후 오직 수도를 할 것이며, 주자의 학문을 근본으로 하라."

그리고는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제사하도록 유언했다. 그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괴산의 화양동에 이들을 제사지내는 만동묘를 세웠는데, 만동묘는 우암이 생전에 명나라의 신종·의종을 제사지내고 중국식 복식으로 생활한 그 뜻을 이어받은 것으로 우암든,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도왔고, 의종은 나라가 망하자 자살을 한 절의의 임금으로 마땅히 이에 보답하고 본받을 만하다고 생전에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권상하는 또한 숙종의 명을 받아 명의 태조, 신종, 의종을 같은 뜻으로 제사 지내는 '대보단'을 창덕궁 옆 금원에 세우기도 했다.

그는 계속되는 당쟁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흐트러짐없이 초연하게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1703년 찬선, 이듬해 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 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1705년 이조참판에 이어 찬선, 1712년에는 판윤에 이어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에 이에 우의정, 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소를 올리고는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우암선생의 제자 중엔 김창협, 윤증 같은 훌륭한 사람도 있었으나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이어받아 후세에까지 전한 사람은 권상하로서 우암의 수제자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우암과의 관계 때문에 그는 본의 아니게 정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스승인 우암이 화를 당한 것은 소론의 우두머리인 윤증이 윤후의 무리와 함께 조직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우암의 비문에 적어 소론측 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 성혼 등으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 문제를 체계적으로 검토, 연구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정립 된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의 '기발이승일로설'중 이이의 이론을 받아 송시열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가 유학사에 남긴 공헌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호락론'으로 논쟁을 벌여 유학발전에 활기를 띠게 한 이간과 한원진 같은 걸출한 제자를 배출한 사실 이다. 인(人)과 물(物)은 성이 동일하다는 이간의 학설인 '락론'과 인과 물의 성이 각각 다르다는 한원진의 학설인 '호론'의 대립이 이른바 호락론이다. 이 두 제자의 치열한 학문적인 논쟁에서 그는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하는 등 진지한 참여의식을 보였다.

아무튼 그의 곧고 중후한 인품과 높은 학문은 그가 81세의 장수를 누리는 동안 당시의 정계와 학계는 물론 후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간과 한원진 이외에도 그의 제자로는 윤봉구, 채지홍, 이이근, 한상벽, 최징후, 성만정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가 있으며, 저서로 「한수재집」, 「삼서집의」등이 있다.

시호는 문순이며 충주의 누암서원, 황강서원, 보은의 신앙사 등 10여 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수몰로 한수면 송계리로 옮겨 복원된 영당엔 그의 스승 송시열과 제자인 한원진, 윤봉구의 영정이 함께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