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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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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1554∼1592)
내용   인물 이미지 없음  

옛날 시골 냇가 큰 바위 밑에 용만한 큰 구렁이가 살고 있으면서 사람이나 가축이 지나가면 슬그머니 잡아 먹으니 동네 사람들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워낙 크고 힘이 세어 사람의 힘으론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그 근처엔 얼씬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 구렁이가 어서 늙어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아홉살 난 소년이 용감히 나섰다. 바로 이 동네 꼬마대장이다. 소년은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손에 들고는 같은 또래의 부하들을 불러모았다.

"저 바위 위에 올라가 뱀을 꾀어 내어라. 그러면 내가 처치할 것이다."

그러나 올라가려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걸 보자 다시 소년은 호통을 쳤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 알겠느냐?"

그제서야 소년의 위압에 눌린 아이들은 마지못해 바위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이들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더니 큰 구렁이가 기어나왔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아우성을 쳤다.

"에잇, 괘씸한 것."

소년은 이를 보자 이를 악물고는 활 시위를 당겨 가까이 다가가서는 힘껏 쏘았다. '퍽' 아주 순간적이었다. 화살이 놈의 머리에 정통으로 꽂힌 것이다. 그러자 솟구치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더니 콸콸콸콸 도랑물처럼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10여 일 이로 인해 강물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는 것이다. 이 용감하고 지혜로운 소년이 훗날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죽음으로 지킨 그 유명한 김시민 장군이다.

김시민은 1554년 8월 27일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에서 출생했으나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농촌리에 있는 그의 사당인 충민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다. 그가 태어날 때 어찌나 울음소리가 우렁차고 몸집이 컸던지 장군이 나왔다는 소문이 다른 마을까지 퍼져 나갔다고 한다. 소문대로 그는 자라면서 산과 들을 누비며 칼쓰기, 활쏘기를 즐겨하면서 동네아이들의 대장이 되어 병정놀이를 자주 했다. 그의 8세 때의 일화가 전한다.

어느 여름날, 꼬마대장 김시민이 번잡한 길거리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는데 마침 그 곳 군수의 행차가 지나가게 되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대장의 구령에 맞춰 훈련을 하고 있자

"이놈들 군수 어른의 행차이시다. 썩 길을 비키려므나."

하니 대장이 앞을 떡 가로막으며

"지금 여기는 전쟁중이라 아무도 지나가지 못합니다."

하고는 당당하게 딱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하도 맹랑하여

"허어 병정놀이인 것 같은데 갈 길이 바쁘니 어서 비키려므나."

하고 사정을 하자

"그래도 안됩니다. 굳이 지나가시려거든 저희와 싸워 이곳을 뚫고 나가십시오."

하며 군수에게 활을 겨누는 게 아닌가.

'으음 맹랑한지고 ..., 나라의 장군감이로다.'

군수는 속으로 기특히 여기고

"허어 그대는 뉘댁 자손인가?"

하고 물으니 병졸 아이들이 의기가 양양하여 앞을 다투어

"저 마을 지평댁 아들이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길로 군수는 대장 소년의 아버지인 지평 김충갑을 찾아갔다. 갑자기 군수가 들이닥쳐 이런 사실을 말하자 지평은 너무도 황송하여

"아이구 이를 어찌합니까. 하라는 글공부는 안하고 병정놀이만 즐겨하니 큰일이옵니다."

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러자 군수는

"아닙니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시민 소년을 훌륭한 장군감으로 키우도록 하십시오."

하고는 꼬마병정들의 진을 피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민의 어머니는 아들이 무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을지문덕, 김유신, 강감찬 장군들도 무인이며 직접 조상되는 김방경 장군도 무인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아무리 졸라도 무인은 문인보다 지체가 낮다며 꼭 과거엔 문과에 응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엔 당파싸움이 극심하고 더구나 장차 나라에는 큰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이 있는 터라 어머니께 불효이나 나라일을 생각하여 시민은 무과에 응시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 25세 되던 1578년(선조 11)에 마침내 무과에 응시 당당히 급제했다. 이로부터 벼슬에 올라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고 2년후인 1583년(선조 16)엔 당시 도순찰사 정언신의 직속 장수로서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니탕개는 두만강변의 여진인 추장으로서 당시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들의 대우를 소홀히 한다는 것을 이유로 난을 일으켜 큰 소란을 떨었던 것이다.

그 후 시민은 훈련원 판관이 되었는데 군사훈련에 관한 문제를 병조판서에게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 진주 판관으로 부임한다. 이 때 부임지로 내려가면서 그는 모친이 사는 고향마을로 행차를 돌렸다. 소문이 퍼져 마을 사람들이 구경차 몰려나왔다. 그 때 어머니도 그 틈에 끼어 있다가

"문과행차만 좋은 줄 알았더니 무과행차도 좋구나. 뉘댁 자손의 행차라 하더냐?"

하고 물어 아들의 행차임을 알리자

"그러냐. 양반도 무관을 할 것이로구나"

하고 모자지간의 갈등을 풀었다고 한다.

마침내 1592년 4월 24일(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 때 그는 병으로 죽은 진주 목사직을 대리하고 있을 때인데 먼저 성 주민들을 안정시키고 사람들을 모아서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장비를 정비하면서 군대를 조직적으로 편성하였다.

부산포로 쳐들어온 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진주로 향하고 있었다. 이에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함께 적을 물리치고 싸워 이기는 등 거듭 공을 세워서 그해 8월 진주 목사로 승진했다. 취임하자마자 그는 곧 총통 70여 병의 화약을 만들어 병정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치고 성을 굳건히 수리하고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주요한 길목이란 걸 알고 진주를 공략하지 못하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10월에 왜장 고시니 유기나가가 수만명의 왜군을 몰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김시민은 성중에 영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자 복장을 하게하고 허수아비에 군복을 입혀 병정으로 가장하여 적이 얕보지 못하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시켰다. 이는 진주성의 주민이 모두 다하여 3천8백여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적은 수로 적을 괴롭히려면 깊은 밤을 이용하여 적을 기습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결살대를 조직하여 기습 공격함으로써 적으로부터 김시민은 귀신이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2만여명의 병졸을 가지고도 7일여나 경과하도록 속수무책으로 피해만 입고 있는 왜병은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군대를 여덟패로 나누어 공격을 해 왔다. 깊은 밤을 이용해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기도 하고 조총을 마구 쏘아대며 물밀듯이 덮쳐 오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김시민의 지휘를 받고 힘을 합친 진주 성민들의 조직적인 방어를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다. 왜병은 다시 최후의 공격을 하기로 하고 전술을 짜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대단히 중요한 이 정보를 제공해 준 사람은 뜻밖에도 어린 소년이었으니 당시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한 진주성 온 성민들의 단합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알 수 있다. 이 싸움이 얼마나 격렬하고 통쾌했던가는 지붕의 기왓장까지 날려가며 밤새도록 싸운 결과 살아남아 도망간 왜병의 수가 2천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그런데 하늘도 슬퍼서 눈을 감았다는 이 안타까운 일을 어쩌려! 왜병이 물러나자 성중을 순시하던 김시민 장군은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에 의해 이마에 조총탄을 맞은 것이다. 서둘러 치료했으나 워낙 상처가 깊었다. 그래도 그는 그 위급함에도 나라 일을 근심하며 궁궐 쪽에 절을 하며 눈물을 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592년 10월 20일 39세였다.

그 후 1604년 선무공신 2등에 올려지고 영의정과 상락부원군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