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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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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1544∼1592)
내용    

1553년 조선 명종 8년, 구두물(지금의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 감정 3리)이란 마을에, 열살에 어머니를 여윈 '헌'이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마는 겉으로 당황함을 보이지 않으면서 의젓하게 마음을 다스리고 있어 마을 사람들이 그 어른스러움을 칭찬하면서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소년을 보살펴 주었다. 얼마 후 헌의 아버지는 새부인을 맞아 들였다. 계모로 들어온 김씨는 성품이 퍽 엄하고 까다로웠다. 헌이 아무리 친어머니처럼 웃는 낯으로 대하고 공경을 해도 까다롭게 대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헌이 외가에 다니러 갔다. 그런데 벌써 소문으로 듣고 있던 외할머니가 걱정스런 낯빛을 하며,

"듣자하니 네 어머니가 너를 대하는 것이 인자롭지 못하다고 하니 앞으로 너는 어떻게 살아갈 작정이냐?"

하고 물었다. 그러나 헌은 그저 엎드려 듣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얼마후 외가에 갔다. 외할머니는 하도 오래간만에 온 외손자가 반갑기는 했지만 하도 이상해서

"네가 오래도록 나를 찾아보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헌의 입에선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지난번에 여기에 왔을 때 외할머님께서 새어머니의 잘 잘못을 말씀하시는 것이 차마 듣기가 거북하여 감히 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차 어린 것이 이럴 수가 .......,

그 후로 외할머니는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외손자가 찾아와도 새어머니에 대한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한다.

이 헌이란 소년이 바로 뒷날 임진왜란 때 보은과 청주 싸움을 이기고 최후의 금산 싸움에서 7백의사와 함께 몸을 불사른 의병장 조헌이다. 조헌의 호는 중봉, 도원, 후율이라 하는데, 이중 '중봉'은 친구와 학자 그리고 그를 따르는 젊은 선비들이 즐겨 부른 호로서 지금까지도 이름처럼 불리고 있다. 그의 계모 김씨는 그가 30세가 넘어서까지도 까탈을 부렸는데 그럴때마다 그는 자신의 효성과 공경심이 모자란 탓이라 여기고 더욱더 효심으로 공경하니 차차로 계모의 마음이 누그러들다가 마침내 그가 장열히 순절한 뒤에야 그의 참효를 깨닫고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세상에 어찌 다시 있으리오. 슬프도다! 이 아이는 진정 내 아들이다. 생모는 단지 낳아 주었을 뿐이다."

하며 통곡하고는 8년 후 죽을 때까지 중봉의 이름을 부르며 슬픔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12세 때인 1555년(명종 10)에 김 황에게 본격적으로 글을 배웠는데 워낙 집이 가난했던 까닭에 추운 겨울에도 옷과 신을 제대로 입지도 신지도 못했으면서도 험하고 먼 산길 너머에 있는 글방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돕거나 산에 가서 땔나무를 벨 때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글 공부는 날로 발전하여 1565년에 당시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들어갔고 2년 후 마침내 문과에 급제하니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리하여 이는 이듬해 1568년(선조 1)에 평안도 해안에 있는 전주목의 교수(유생을 가르치는 직책)를 출발로 벼슬길에 올라 파주목, 홍주목의 교수를 잇달아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그곳 유생들의 기풍을 바로 잡았다.

그가 지금의 경기도 지방인 파주목에 있을 때, 당시 이 이(율곡)와 쌍벽을 이룰만한 대학자인 성혼이 마침 몸이 불편하여 벼슬을 내놓고 그의 고향인 파주로 내려와 학문에 힘쓰고 있던 중이어서 그를 찾아가 「역경(주역)」을 배우고, 지금의 충남 홍성지방인 홍주목에 있을 대는 그 근처 해변에 와 조용히 살고 있는 토정 이지함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해 가을엔 학문 연구를 위해 벼슬을 내놓고 파주에 와 머물고 있는 대학자 이율곡을 찾아가 그의 깊고 그윽한 학문을 직접 배웠다. 이렇게 벼슬에 있으면서도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으로 하여 그의 예언은 신통하리만치 적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가르친 이들 세 사람은 하나 같이 그의 사람됨과 깊은 학문에 감탄하고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예언했다고 한다.

29세 되던 해인 1572년(선조 5), 그는 중앙관직인 교서관으로 있을 때 왕가의 안전을 위해 불공을 올리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에 그는 이런 일은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의 일엔 맞지 않는 일이라며 상소하는 바람에 왕의 노여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이듬해 왕의 특명으로 교서관 저작(정8품)으로 승진했는데 또 그 일을 맡기므로 다시 나라 일에 위배됨을 상소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니 그의 곧은 성품을 가히 알 수 있다.

1574년(선조 7)에 그는 성절사(중국에 경사가 있을 때 축하하러 가는 사신) 박희립의 질정관(중국에 가서 글의 음운이나 기타 사물의 의문점을 물어 알아오는 관직)으로 명나라에 갔다. 거기서 3개월 동안 머문 그는 돌아와 그때 본 것 중 본받을 만한 문물제도 8가지와 착한 행실, 좋은 정치 16가지를 골라서 왕께 상소했으며 「조천 일기」라는 견문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듬해 그는 교서관 박사, 호조좌랑, 성균관전적,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통진현감이 되었는데, 당시 32세로 수령은 처음이었다. 2년동안에 그는 선정을 베풀어 그 곳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버릇없이 행패를 부리는 관노를 엄히 벌주다가 그만 그 관노가 죽는 바람에 그를 헐뜯는 무리들의 모함에 걸려 누명을 쓰고 부평으로 귀양가서 37세 되던 해 풀려났다. 그리고 전라도 도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 와 있는 정철(송강)과 친분을 맺는다.

다음해 중봉은 보은 현감으로 보내줄 것을 자청하여 보은 현감이 되었다. 현감자리는 비록 외직이긴 하나 비교적 한가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홀로 있는 계모를 보살피고자 함이었다. 그의 부친은 그가 부평에서 귀양살이 할 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 기간에 선정을 하고, 당시 벼슬아치들의 비리를 상소하는 등 나라를 위해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못마땅히 여기는 무리들의 모함으로 시달리던 차, 그가 존경하는 이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실의에 빠지고, 또한 당파 싸움에 회의를 느끼고는 1584년 (선조 17) 벼슬에서 물러나고 만다. 그리고는 서울을 떠나 옥천의 안읍(지금의 안내면) 밤터 (후율) 산속에 들어가 묻혀 살면서 '후율정사'를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후율은 그의 또 하나의 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1586년(선조 19)에 다시 공주목 제독에 임명되었으나 이때는 조정의 당파싸움이 극에 달하여, 정여립 같은 사람은 같은 서인으로 성혼, 정철 등을 모함하고, 세상을 떠난 스승인 이율곡까지도 공공연히 배반하면서 동인으로 돌아섬에 이르니 이에 중봉은 정여립을 논박하는 만언소(상소)를 지어 다섯번이나 올렸고 정여립의 모반을 예언까지 하였으나 반응이 없자 다시 옥천으로 내려왔다.

그때 일본의 풍신수길이 우리나라 정세를 염탐하기 위해 사신을 가장하여 보내온 일이 있었다. 이를 알고 중봉이 대궐로 달려가 사신을 배척하는 소를 누차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왕의 노여움만 샀을 뿐이었다. 중봉이 46세 되던 해인 1589년(선조 22)에 그는 다시 대궐로 달려갔다. 더이상 당쟁만 일삼는 동인들의 행패와 지방 수령들의 비리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어서였다. 이번엔 도끼를 들고 대궐에 나가 소를 올렸다. 그러나 동인들이 그냥 둘 리 없었다. 그들은 결국 그를 위험인물로 단정하고 귀양 보낼 것을 선조께 매일같이 아뢰어 마침내 그는 함경도 길주의 영동역으로 귀양가고 만다. 그러나 그때 그가 예언한 바 대로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니 그의 선견지명이 인정되어 풀려난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일본 사신과 함께 돌아왔을 때부터 국방력 강화를 부르짖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궐 앞 주춧돌에 머리를 찧어 통곡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592년(선조 25) 왜병이 몰려오니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중봉은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는 격문을 띄우고 옥천에서 의병 1600여명을 모아 적의 진로를 막았다.

그러나 관군의 연이은 패전으로 급기야 왕이 의주로 피난을 가기에 이르니 조헌은 다시 격문을 돌려 의병의 수를 늘리고 승려 의병과 힘을 합쳐 청주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의주로 가서 왕을 보호하기 위해 진격하려는데 이를 시기한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이 금산에 있는 왜병을 토벌해 달라고 간청하여 일단 중봉의 북진을 막아 놓고 의병들의 부모, 처자를 가두고 의병 모집을 방해하니 의병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끝까지 남은 의병은 700명에 불과했다. 공주에 있던 중봉이 이 700명을 이끌고 왜병의 정예부대가 집결해 있는 금산으로 갔다. 워낙 그 수가 수만 명으로 엄청나 관군과 의병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고 전라도 관찰사인 권율과 공주 목사 허욱까지도 진격을 말리고 공격일을 늦추자고 했다. 그러나 중봉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어 8월 17일.

"오늘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마땅히 의병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며 비장한 각오로 명을 내리고 죽음으로 싸우다 화살이 떨어져 육박전에 이르러 부하들이 피할 것을 당부하니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장부는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구차하게 살기를 꾀할 수는 없다."

하고 북을 치며 더욱 독전을 하다가, 그의 충절을 끝까지 따르며 한 사람도 이탈하지 않고 장렬히 싸운 700의병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 때 죽은 왜병의 수는 너무 많아 3일 동안이나 시체를 치울 정도였으니 그와 의병 700명의 죽음은 실로 장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의 시신은 옥천 안읍(안내)으로 옮겨졌고 왜란이 끝난 후 선주원종 일등공신에 봉해졌으며, 현재 이를 기리는 7백의총이 금산군 금성면 의충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