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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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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원(?∼1456)
내용   인물 이미지 없음  

유성원이 단종 복위를 위하여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사육신의 한 사람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충북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부모동 사람으로 관직에 나가기 전에 어린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출생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1444년(세종 26) 식년 문과의 급제로 집현전 학사가 되어 당시의 의학총서인 「의방유취」편찬에 참여하고, 1446년엔 박사로 승진하며 이듬해엔 문과 중시에 급제하는 등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명석한 판단력과 논리적인 사고력은 이름이 나 있다. 세종 초까지 중국 송나라의 자세한 역사가 없어서 세종이 여러번 명나라에 이 「송사(宋史)」를 청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이 송나라 조정의 인물들에 대해 논의하다가,

"왕안석이 송사의 인물전에 들어 있을까?"

하는 말이 나왔다.

왕안석(1021-1086)은 송나라의 정치가이며 학자로서 신종 때 지침지정사가 되어 부국강병책으로 균수, 정묘, 모역, 시역, 보갑, 보마 등 소위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만들어 행하였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여론에 밀려 정권을 잡은 지 9년만에 물러난 사람이다.

이런 왕안석을 놓고 하는 말이었다. 이 때 여러 학자들은, 왕안석은 황제에 아첨하기 위해 되지도 않을 '신법'을 만들었던 인물이어서 마땅히 '간신전(奸臣傳)'에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왕안석이 신법을 만들어서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소인이긴 하지만 문장과 절의가 일컬을 만한 것이 많고, 그 마음을 캐어 보면 오직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 있을 뿐이다. 그가 천하를 그르친 것은 다만 성품이 오만하고 고집이 센 데 있는 것이니 마땅히 열전(列傳)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

는 것이었다. 이를 주장한 사람이 바로 유성원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 「송사」가 왔는데 과연 왕안석은 열전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해서는 그의 실력과 인품을 높이 보고 세자의 지도를 간곡히 부탁하였으며, 1452년에는 김종서,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고쳐 편찬할 때에는 최항,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열전을 썼고 이해 3월엔 춘추관 기주관으로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453년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여 지평(사헌부에 소속된 정5품관)에 오르면서 그의 학자다운 꼬장꼬장한 성품과 대쪽 같은 절의가 돋보이기 시작한다.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갔다 왔는데 수양대군이 그때 자기를 수행한 사람들의 벼슬을 정 3품 이상의 품계로 높여 줄 것과 또 세종 때 군담집인 「역대병요」(중국 상인때부터 조선 태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책에 나오는 흥미있는 전쟁기사를 뽑아 모은 책)를 편찬하는 데 적극 참여했던 사람들의 공이 크니 이들에게도 역시 벼슬을 정3품 이상의 품계로 올려 줄 것을 왕께 청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왕도 그렇게 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유성원이 나선 것이다. 그러한 개인적인 일을 가지고 수양대군이 왕께 청하는 것은 조정의 신하가 자신의 친족(왕)에게 아부하고 친족(왕)은 개인적인 은혜를 베푸는 일이므로 이는 부당하니 하명을 회수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류성성의 청은 관철되었다.

이 해 10월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을 야심으로 정인자, 한명회 등과 공모하여 단종의 보호책임을 맡은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이고 아우인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킨 다음 스스로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직을 겸하여 정권을 잡았다. 이 해가 계유년이므로 이를 '계유정난'이라 한다. 수양대군이 정난의 공을 한껏 높여 임금에게 표창해 줄 것을 청하고 집현전에 명하여 이 정난의 공헌을 기록으로 남기는 교서를 짓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듣자 지비현전 학사들이 모두 몸을 피했는데 교리였던 유성원만이 남아 있다가 갖은 협박에 못 이겨 기초를 하고는 집에 돌아와 울분을 못참고 대성통곡을 했다 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런 말이 전하기도 한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짓고 새끼를 낳으니 모두 흰색이었다. 좋은 일이었는지 이 때는 나라의 요직이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으니 영상에 정인지, 좌상에 이은철, 정창손 등이며, 박중림, 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이개 그리고 유성원 등의 이름도 높았다.

그런데 계유정난이 일어나는 계유년에 집현전의 버드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농담조로 버드나무 류(柳)자 성을 가진 유성원에게

"화가 아무래도 류(柳·버드나무)로부터 시작할 것 같다."

고 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교서 일이 터진 것이다. 이 교서 사건 다음달 11월, 장령이 되었을 때 이 정난 공신의 책정이 공정하지 못했음을 따져 고칠 것을 청하였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 1454년엔 경복궁 내의 불당을 없앨 것을 상소하고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는 등 여러가지 일들을 의욕적으로 행하려 했으나 사헌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이를 이유로 장령을 사임했는데 곧바로 수집현전에 임명되었다.

1455년 마침내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 이에 무고하게 폐위된 단종의 복위를 위해 많은 신하들이 노력을 했는데 그 중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그리고 유성원 등이 암암리에 모의 하던 중 1456년(세조 2)에 성균관 사예로 있던 김질의 고자질로 사전에 발각되었다. 일이 탄로나자 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는데 이때 유성원은 성균관에 있다가 다른 유생들로부터 이러한 기별을 들었다. 그는 곧 집으로 돌아와서 관대도 벗지 않은 채 아내와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사당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한참이 되어도 사당에서 내려오지 않기에 그의 아내가 올라가 보니 그가 관대 입은 채로 반듯이 누워서는 찼던 칼을 빼어서 목에 대고 나무토막으로 칼자루를 내리치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가 영문을 모르고 놀라 떨고만 있을 때 갑자기 관청에서 몰려와 시체를 가지고 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시체를 찢었다는 기별이 왔다. 이렇게 하여 죽은 여섯 사람들이 곧 사육신이다.

뒤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그 당시의 정황에 의거해서 단종 복위 사건의 주인공들로 여섯사람을 선정하여 이들의 전기문인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는데 「육신전」이 세상에 나오자 나라에서 이 여섯 신하의 절의를 인정했고, 1691년(숙종 17)에 와서는 이들에게 사육신의 관직과 직위를 하사했다. 이로써 유성원 은 복관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902년(광무 2)엔 충신정려가 내려졌다.

그는 서울 관악구 노량진동에 1782년(정조 6) 건립된 '유명조선국 육신묘비'에 묻혀 있다. 지금도 노량진의 민절서원, 홍주의 녹운서원, 대구의 낙빈서원, 의성의 학산 충렬사, 영월의 창절사에서 제사를 지내며 「가곡원류」에 그의 시조 한 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