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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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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보(1333∼1400)
내용   인물 이미지 없음  

고려 말기와 조선초의 문신인 우현보(1333-1400)의 자는 양세당(養洗堂) 이고, 호는 원공(原功)이며, 본관은 단양이다.

우현보는 고려시대 1355년(공민왕 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좌사의 대부에 까지 이르렀고 단양부원군까지 되었지만, 항상 그는 한 나라의 임금만을 섬기지 못하였음을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늘 죄지은 듯한 슬픔과 불안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백성만을 위한 바른 행정을 펴 나가는 데 온힘을 쏟았다.

조선 태종 임금은 우현보가 친구로서 청렴결백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곧은 성품인 것을 알아 단양백으로 승진시킨 후, 다시 그에게 좌명공신 및 청백 (淸白)의 호를 하사하였으나 우현보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사양하며 하나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태종은 그가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옛날의 다정한 친구로 다시 돌아가 왕의 제복을 벗고, 평범하고 소박한 옷차림으로 만나 보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인 우현보가 대궐에 들어오면 태종 임금 자신이 중문 밖까지 친히 나와서 전송을 하는 등 갖가지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태종 임금께서 친절을 베풀면 베풀수록 우현보는 더욱 마음이 언짢았으며, 불안스럽고 불편하며, 자신이 더더욱 부끄럽기만 하였다. 태종 임금이 자신에게 너무 마음을 두는 것이 오히려 고려말에 한 나라의 임금을 섬기지 못한 비굴함과 죄스러움만을 부추길 뿐이라고 우현보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자신이 관직에서 물러남이 옳다고 생각하였기에 그는 관직을 훌훌 정리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늘 청렴결백하여 그가 입는 의복은 사시사철 때에 따라 갈아입을 옷이 없어 남루한 옷을 일년내내 입고 살아갔다. 조석으로 호박범벅이나 죽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콩을 삶아 만든 콩죽을 끓여 먹는 것이 예사였으며, 산과 들에서 나는 나물을 뜯어 다가 나물밥이나 나물을 섞어 만든 떡을 해 먹고 살아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우현보를 두 상공(豆 相公)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이며 손자들 중에는 정승 자리까지 차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자손들은 이씨 조선에서 받은 녹미(祿米)가 불명예스럽다고 여기는 대쪽 같은 아버지를 모실 수가 없었다.

우현보는 늘 자손들에게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 하였다.

"나는 망국의 대부이다. 하늘과 땅에까지도 죄를 지은 몸이니 내가 죽으면 우리 가문의 어른들이 잠들고 계신 선영에 묻지 말아다오. 또한 우리내외도 같이 합장시켜서도 아니되며 내 무덤 옆에 단 한사람의 자손도 가까이 묻지 말고, 내 스스로 평소에 자신을 죄인처럼 여기다 죽어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주려므나."

라는 말을 자주하였다.

이처럼 우현보는 고려말기의 한 임금만을 섬기려다 이방원에게 황해도 개성 에 있는 선죽교에서 타살된 포은 정몽주와 같은 일편단심을 가진 사람으로 우현보 자신은 그처럼 죽지 못한 것을 항상 죄스럽게 생각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그의 뇌리에 늘 파고 들어 떳떳이 살지를 못했다.

우현보의 성품은 항상 검소하고 청렴결백하여, 오직 한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려는 일편단심이었으며, 절개가 곧고 강직하기가 이를 데 없다고 야사에서도 전해 오고 있다. 또한 부모와 웃어른에 대한 예우도 극진하였다. 우현보의 일편단심의 곧은 절개와 충정어린 마음은 멋 훗날까지 우리 후손들 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