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영역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하단링크 바로가기

꿈나무키우는 충북!

어린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충청북도 도청

자랑스런 충북인

자랑스런 충북인 상세보기 - 제목, 내용 제공
우륵
내용  

고구려의 왕산악, 조선의 박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우륵은, 「삼국사기」에 인용된 「신라고기」에 가야국 성열현 사람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고령지방으로 본시 대가야 즉 고령가야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야국의 성열현은 지금의 충북 청풍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성열현과 비슷한 음을 가지고 있는 '사열이현'이 「삼국사기」의 지리지에 나오는데, 이곳이 지금의 충북 제천시 청풍의 고구려 시대 지명으로서 바로 여기가 우륵의 출생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단재 신채호도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성열현은 지금의 청풍이라고 밝히면서 우륵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고, 또 「대한강역고」에 의하면,
"'성열'은 '사열'이니 지금의 청풍이다. 우륵이 청풍과 충주에서 놀았다."고 전한다.
어쨋든 신라 본기 진흥왕조에,
"진흥왕 12년(551년) 3월, 왕이 국내를 순행할 때 하루는 낭성(娘城)에 이르렀는데 우륵과 그 제자 이문이 음악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히 그들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그들은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 하였다."
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낭성은 지금의 청주를 이르는 말이다. 또
"진흥왕 13년(552년)에 왕은 우륵을 국원(國原)에 안치시키고 계고, 만고 했는데 여기서 국원은 지금의 충주 를 일컫는 것이다. 한편「충주읍지」에는 우륵이 지금의 충주시 칠금동 산1번지에 있는 탄금대에서 가야금에 전념하였다고 쓰여 있다. 이때 우륵이 탄금대에서 탄 가야금의 오묘한 소리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들이 부근에 부락을 이루었는데 그곳이 곧 지금의 칠금동, 금능리, 청금리라는 것이다.

이로 보아 우륵이 음악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며 활동한 무대는 주로 충북, 그중에서도 충주 의 탄금대였음을 알 수 있다. 또 탄금대는 이름 그대로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한편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야금을 전수한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일찍이 가야국의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었는데, 하루는 우륵을 불러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르거늘 음악소리도 어찌 한결같이 같을 수 있겠는가?"

하고 가얏고를 위하여 악곡을 지으라고 명하여 우륵이 왕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다고 하는 옛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우륵의 가야금에 대한 재능과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가 는 짐작할 수 있다. 또 가야금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에도 능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는 당시 가야국에서 인정받는 빼어난 예술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륵이 가야국 가실왕의 명에 따라 지었다는 12곡은 곧 상가라도(고령), 하가라도(고령 부근), 물혜(선산 지방), 보기(성, 산), 달기(예천 지방), 사물(사천 지방), 하기물(금천 지방), 상기물(금천 지방 부근), 사자기(오늘의 사자춤), 거열(거창 지방), 사팔혜(초계 지방), 이사(미상) 등이다. 12곡중 보기, 이사, 사자기를 제외한 9곡은 그 곡명이 가야 지방의 지명으로 가실왕의 뜻에 따르느라 그 지방의 독특한 정서가 드러나도록 지은 이른바 민요의 성격을 띤 악곡이라고 할 수 있다.

우륵이 태어난 대가야는 16대 520년간 존속하다가 신라 진흥왕(562년)때 신라에 합쳐졌다. 그런데 우륵은 대가야가 망하기 11년전인 진흥왕 12년(551년)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몸을 맡겼다고 한다.

우륵의 재능과 명성을 익히 듣고 이를 인정한 신라의 진흥왕은 우륵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국원, 즉 지금의 충주에 특별히 거처를 마련해 주고 법지, 계고, 만덕 세 사람을 보내어 우륵의 음악을 전수케 하 였다. 그리하여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능을 각각 시험해 보고는 법지에게는 노래를,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만덕 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이윽고 수업이 끝나자 왕은 이들 셋을 불러 그간에 익힌 것을 연주케 했는데, 다 듣고 난 왕은 먼젓번 국내 순행시 낭성에서 우륵에게 들었던 음악과 조금도 다름없다며 흐뭇해하고는 이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세 사람은 스승인 우륵의 12곡 중 11곡을 배운 다음 이 스승의 음악은 너무 번거롭고 음란해서 우아하거나 단정한 감이 없으니 다시 고쳐 보자하여 이를 5곡으로 만들었다. 처음엔 이를 전해 듣고 몹시 노한 우륵은 이 5곡을 다 듣고 나서,

"이 음악은 즐거우면서도 흐르지 아니하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아니하니 가히 정악이라 할 것이다."

하며 감탄해 마지 않고는 이를 곧 왕에게 연주해 보이니 왕도 크게 기뻐했다. 이는 우륵이 권위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음악만을 사랑하고 음악에만 전념하는 참된 음악인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한편 왕의 지원 아래 우륵의 음악이 절정에 이르고 그 명성이 높이 드날리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 들이 생겨났다. 그 당사자가 신라 본국인도 아닌 피정복국인 가야국 사람임에랴.
신라의 대신들은

"가야의 망국지음은 취할 바가 못된다."

고 왕에게 간언했다. 즉 가야국이 망하게 된 것은 가실왕이 음악을 너무 즐겼기 때문으로 신라도 왕이 너무 음악에 빠져 들면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에 왕은

"가야왕 자신이 음란하여 스스로 망한 것이지 모름지기 음악의 죄가 아니다. 성인이 악법을 제정해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니 오히려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다스려졌지 음률 때문에 어지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하고 우륵을 감싸고 두둔하며 그대로 행하게 하여 마침내 대악으로 발전시켰다. 우륵의 음악이 이렇게 날개를 펼 수 있고, 우륵이 음악에 대한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데에는 이처럼 뒤를 밀어 준 임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거문고가 귀족이나 문인의 악기라면, 가야금은 전문 음악인의 악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교방이나 장악원이라고 하는, 음악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를 통해 그 전통을 이어왔다. 가야금의 선율이야말로 망국의 음이라고 신라의 대신들이 왕에게 간할 정도로 그 선율이 사람의 마음을 슬프고 아프게 만들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사람의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고 순화시켜 주는 오묘함이 있다 한다. 그러기에 천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우륵의 이름과 함께 이어오는 것이다.

우륵의 말년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충주읍지」에 우륵이 탄금대 에서 가야금에 전념하였다는 것과 여기서 간 우륵의 가야금 소리에 끌려 사람들이 부근에 부락을 이루어 살게 된 곳이 바로 충주의 칠금동, 금능리 등의 마을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이 유서 깊은 충주지방에서는 악성 우륵의 위대한 음악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일찍부터 우륵문화제를 제정하는 한편 1977년엔 '악성 우륵 선생 추모비'를 건립했고, 제천의 의림지 주변에는 우륵당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