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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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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내용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의 일이다. 지금의 충북 진천군인 만노군에 태수(군수) 김서현이 만명부인과 신혼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명부인은 아이를 잉태한 지 열달이 넘었는데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다가 스무 달이 되어서야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기는 갓 낳은 아기답지 않게 울음 소리가 우렁차고 뼈대가 굵었으며, 거북이 모양의 등에는 북두칠성 같은 일곱 개의 점이 있는가 하면, 호랑이상의 이마에다 용의 모양을 한 눈썹 아래엔 샛별 같은 눈이 빛났고, 턱은 마치 제비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태수 김서현은 처음엔 아기 이름을 경진이라 지으려 했다. 그것은 경진일(日) 밤 꿈에 내외가 똑같이 크고 찬란한 별이 자신들의 품안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날과 달을 나타내는 간지로는 이름을 짓지 않는 풍습이 있어 경(庚)자와 모양이 비슷한 유(庾)자와, 진(辰)과 소리가 가까운 신(信)으로 고쳤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가 아깝기도 하고 튼튼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라사투리로 굳세다는 뜻을 가진 '산다라'로 지어 불렀다. 이 아기가 바로 1300년 전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의 장군 김유신이다. 때는 595년 진평왕 17년이다.

김유신의 집안은 원래 가락국의 왕족이다. 가락국이 10대를 내려오다가 521년 구해왕 때 신라에 합병됐는데, 구해왕의 세 왕자 중 신라에 큰 공을 세워 조그만 지방 나라의 왕까지 된 무덕왕자가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아버지로부터 이런 집안의 내력을 알게 되고, 그 긍지를 살려 몸을 튼튼히 길러서 삼국을 통일해야 된다는 말을 들은 어린 유신은 이미 이 때부터 삼국통일의 의지를 마음 깊이 새긴다.

유신이 출생지인 지금의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계양부락을 떠난 것은 10세를 전후한 어린 시절에 아버지 김서현이 다시 서라벌로 가게 된 때문인데, 서라벌에 온 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된다. 화랑이란, 원래 나라를 지키는 큰 인물을 길러내기 위해 나라에서 벼슬 높은 귀족이나 이름난 장군의 아들 중에서도 지혜 롭고 어질며 용감한 젊은이를 뽑아 학술과 무술을 연마시키고자 뽑은 소년을 일컫는 말로 그 무리를 화랑도라했다.

여기서도 유신은 슬기와 재주, 무예를 높여 우두머리인 수좌가 되고 18세에는 최고 영예인 국선화랑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화랑도 정신이 몸에 밴 유신이라 하더라도 이성을 그리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춘선이라는 기생을 동정하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는 춘선이가 이름을 '천관'이라는 여염집 여자 이름으로 바꾸게 되면서 둘은 남모르게 살림집을 차렸다. 하지만 이런 일이 오래 감추어질 리 없었다. 곧 어머니인 만명부인에게 알려지고, 유신은 천관의 집에 발을 끊기로 굳게 결심했는데 또다시 엉뚱한일이 벌어진다.

술취한 몸을 말에 의지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날, 와서 보니 천관의 집이었다. 천관의 집으로 가는 길에 익숙한 말이 옛 길을 찾아간 것이다. 깜짝 놀란 유신은 칼을 빼들고 말에게 소리쳤다.

"네 이놈 아무리 짐승이기는 하나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죽어 마땅하다. 에잇".

하고 단숨에 말의 목을 잘라 버렸다. 여기에서 한 번 먹은 결심은 굳게 지키는 유신의 엄격함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은 혼자보다 둘이 합치면 힘과 슬기가 배로 늘어난다. 서로 의기가 투합하는 사람끼리라면 더욱 그렇다. 김유신과 김춘추와의 만남이 바로 그랬다.
김춘추는 신라 25대 임금 진지왕의 손자로 유신보다 여덟살 아래다. 그는 고구려와의 낭비성싸움에서 아버지를 도와 용맹을 떨친 유신의 소문을 듣고 유신을 찾아가 사람됨을 보고는 왕에게 천거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하고, 자주 만나 나라 일을 의논하였다. 이를 기회로 유신은 꾀를 내어 누이동생인 문희를 김춘추와 짝을 맺게 함으로써 김춘추와는 물론 왕족과 더욱 가까운 관계가 된다. 이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마음먹었던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아 놓는 계획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왕족이면서 영웅인 김춘추와 손을 잡아야 수월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후 김춘추가 백제의 잦은 침략을 뿌리뽑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가서는 오히려 붙잡혀 볼모가 되었을 때, 유신이 3천의 군사로 5천의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사로잡은 보장왕의 아우인 패양후와 교환함으로써 춘추를 살려내니 둘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그의 계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6대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지 8년마나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귀족들이 진평왕의 어머니인 태소태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과정에서 이를 물리치고 태후로 하여금 춘추에게 양보하게 함으로써 김춘추를 왕이 되게 하는데 유신은 직접 관여하였다. 이 왕이 곧 뒷날의 태종 무열왕 이다. 이 때 김춘추의 나이 52세 김유신이 60세였다.

이리하여 최고 벼슬에 올라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며 둘 사이는 더욱 긴밀해지면서 유신의 위상과 정치적 비중은 한껏 높아져 마침내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를 총 지휘하게 되는 것이다.
   삼국통일의 서막은 백제와의 싸움이었다. 김춘추가 왕이 되고 신라가 안정을 찾았을 무렵 백제의 의자왕이 사치를 좋아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있음을 알고 유신은 무열왕과 의논하여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원군을 청하는 한편 직접 백제로 쳐들어간다. 이 때 애초 신라군은 동쪽에서, 당군은 서쪽 바다에서 백제를 협공하여 백제 서울인 사비성(지금의 부여)에서 7월 10일 두 나라 군(軍)이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신라군은 지금의 논산인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 장군에게 네번이나 패하여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화랑인 반굴과 관창이 어린 몸으로 적진에 돌격하여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을 보고 신라군이 용기를 내어 백제군을 격파했다. 이러한 일로 당군과의 약속한 기일이 늦어졌는데 소정방은 이를 빌미로 군법을 어겼다 하여 신랑 장군 김문영을 처형하고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유신은

"늦은 이유로 죄를 씌우고자 하나 허물없이 욕을 받을 수 없다. 정히 그렇다면 당군과 싸우고 나서 백제와 싸우겠다."

하여 소정방의 기를 꺽고 김문영을 구하였다. 결국 약속 이틀 후인 7월 12일 신라·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무너뜨렸다.
백제를 멸하고 건강이 나빠진 김춘추가 세상을 떠나니 묘의 이름을 태종이라 하고 시호를 무열이라 했다. 태종 무열왕이란 칭호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유신은 태자 법민을 임금자리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신라 30대왕 문무왕이다.

문무와 8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군의 출동을 요청했을 때 왕은 유신에게 싸움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의 가르침을 듣고 김음순 장군과 자기 아우인 김인문과 함께 출동하여 평양성으로 쳐들어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때 김유신을 빼놓은 이유가 모두 전장에 나간뒤 나라안에 뜻밖의 일이라도 생길 경우 이를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하니 당시 유신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게 된 문무왕은 유신에게 신라 최고의 관직인 태대각간의 벼슬을 제수했다.

유신 어떤 사람이었나를 아는 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있다. 문무왕 12년 유신은 신라 단독으로 완전한 삼국통일을 하기 위해 고구려의 부흥군을 원조하여 당을 쫓아내려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당이 석문성을 공격했는데 이 싸움에서 유신의 셋째 아들인 원술이 대항하여 싸우다가 패하고 원술은 부장인 담릉의 만류로 살아 돌아오는 일이 생겼다. 이 소식을 들은 유신이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문을 더럽혔다."

하여 자식의 목을 치려 했다. 그러나 왕의 간곡한 만류로 원술은 죽음을 면했으나, 끝내 부자간의 인연을 끊고 용서를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산 속에 숨어 살던 원술이 당나라가 소천성에 침입했을 때 성을 쌓고 용감히 싸워 이겨서 왕이 벼슬을 내렸는데 부모에게 용서받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는 가문을 떠나 살았다. 그런 까닭으로 그 자손들은 원술을 시조로 삼고 진주를 본관으로 삼아 유신의 자손과는 다른 파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신이 나라를 위하고 가문을 위하는 일에 얼마나 단호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삼국을 완전 통일한 유신은, 문무왕 13년(673년) 79세 되던 해에 전장에서 입은 상처로 인하여 병석에 눕더니 7월 초하루 새벽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때 하늘에서 별 하나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삼국통일 쌍기둥의 한 사람이었던 무열왕릉 옆에 묻혔다. 그리고 장언절상이라는 시호가 올려지고 그후 홍무대왕에 봉해졌다.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인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 있는 길상사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