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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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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1879∼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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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은 하일독립운동가로서 1879년(고종 16)에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신용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고령이고 호는 예관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동년군이란 항일 소년의용군을 조직하여 싸우자고 하였으나 나라에서 이 소년단의 해산령을 내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1899년 관립한어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중국어를 수학하였으며 이어 대한제국 육균뮤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재학중 학교당국의 부정에 반발하는 모의에 참여하였는데 신병으로 낙향중에 모의가 실행되어 처벌을 면하였다.
졸업후 임관, 육군 참위가 되어 보병영에 근무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육군부위로 있던 그는 지방군대를 동원하여 의병을 규합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때 오른쪽 눈의 신경이 마비되어 실명하게 되자 이에 스스로 예관이라는 아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1907년 8월 1일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그는 서대문군영에서 다수 부하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패배한 후 대한자강회와 대한협의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한편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중동학교, 청동학교, 문동학교 등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기도 하였다.    

1910년 망국조약의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했는데 더 살아 무엇하랴." 하며 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나철(羅喆)에 의하여 구원 되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문이 이끄는 동맹회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가입한 뒤 10월의 무창의거와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당시 상해에서 혁명사상을 고취시키려고 호한민(胡漢民)등이 「민권보(民權報)」발행을 준비하자 어려운 망명생활에서도 여비 2만원 가운데 남은 돈 1만원을 기꺼이 희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청국정부와 일본 경찰에게 현상 수배되어 프랑스 조계로 피신까지 하였다.    

1912년에는 상해의 교민이 늘어남에 따라 박은식, 신채호, 문일평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동제사를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고 박은식의 「한국통사」「이순신전」「안중근」등을 발간하고 잡지「진단(震檀)」을 발행하여 민족정신을 앙양하였다. 한편 중국 국민당의 이사들과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한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1913년 독립운동의 역군은 오직 교육받은 청년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상해에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박은식, 신채호 등과 중국 혁명의 선구자 농죽(農竹) 및 중국화교 모대위(毛大衛) 등을 강사로 초빙, 3기에 걸쳐 100여명을 배출하여 중국 각 대학 및 구미 유학을 주선하여 주기도 하였다. 또한 군사교육도 장려하여 한국청년 100여 명을 중국 각지의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였으며 대종교의 포교를 통하여 독립의식의 고양에도 힘썼다.    

1914년 11월 19일에「한국혼」을 집필 완성하였는데 그 글머리에 "나는 느껴지는 대로 이글을 써 내려가거니와 그것이 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하였고 또 "마음이 죽어 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는 것이어니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죽은 때문이다. 이제 망국의 백성이 되어 온갖 슬픔을 겪으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 위에 또 한번 죽음이 어함이로다.... 힘쓸지어다. 동포들이여, 다함께 대혼을 보배롭게 여겨 꺼지지 말도록 하며 먼저 사람마다의 그 마음을 구해내어 죽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선생은 계속하여 우리 동포들이 자기 것을 버리고 남의 것만 택함을 슬픈 일고 여기고 민족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한국혼」은 선생의 뜨거운 민족애가 낱낱이 담긴 명문이었고 그 글에는 민족 정신이 살아 꿈틀거리며 높은 기백이 하늘을 찌르는 글로 우리들에게 큰 교육을 주고 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앞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14개 조목의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만주와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와 연락하여 길림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하였고 이어 독립의군부 조직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으며 11월에 법무총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에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였고 1921년에는 외무총장도 겸하였다.    

1920년에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였고 1921년에는 외무청장도 겸하였다. 이해 신생 중화민국 광동정부의 손문과 교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받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그 해 9월, 25일간의 단식끝에 독립을 기원하는 간곡한 유언을 남기고 43세의 젊은 나이로 끝내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그렇게 사랑하던 조국땅에 돌아오자 못한 채 상해 홍차오로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저서로 「한국혼」과 시집「아일루(兒日淚)」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