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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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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1602∼1674)
내용   인물 이미지 없음  

훈련대장을 지낸 이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서 음성군 감곡에서 출생 하였다. 그의 자는 중지, 호는 매죽헌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의 장관격인 판서를 지낸 이수일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1627년 영상현령, 1631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자점 휘하의 장군으로 정방산성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후, 1638년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고 1643년(인조 21) 경기도 수군절도사로 삼도통영사를 겸하였다. 효종 임금이 송시열 등과 같이 북벌계획을 수립하자 1652년(효종 3) 어영대장에 발탁되고, 1653년 훈련대장이 되어 신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보수, 신축 등을 하며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그는 다시 1655년 공조판서를 지내다가 이듬해 다시 훈련대장에 임명되었으나 1659년에 효종이 별세하자 북벌계획은 중지되었다.

이완은 다시 1664년(현종 5) 공조판서, 1668년 훈련대장에 재임용 되었 으며 이듬해 병조판서에 임용되었으나 사양하고 은퇴하였다가 1673년(현종 14) 포도대장을 거쳐 이듬해에 우의정에 올랐다.

조선시대에 훈련원이라는 군사 조직이 있었는데 그곳의 우두머리가 훈련 대장인데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오른팔 역할을 하는 자리였는데 여러 번 그 자리에 올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훈련원 군사들은 15대 광해군을 몰아냈던 강직한 병졸의 집단이었다. 효종 때 구인후가 대장으로 있다 정승으로 승진되면서 그 후임에 참신한 인재를 구하려고 했다.

왕실의 안녕과 직결되어 있어 훈련대장의 재주가 뛰어나도 왕실에서 충직한 신하 아니고는 맡기지 않는 아주 중요한 자리이다. 어느날, 효종 임금은 훈련대장 임명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정태화 정승을 내전으로 조용히 불렀다.

정태화 정승이 어영대장인 51세의 젊은 이완을 훈련대장으로 천거하여 효종은 그를 임명하였다. 당시는 훈련대장 자리만은 60, 혹은 70세가 되어 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젊은 훈련대장인 이완의 군령은 엄격했으며, 군의 기강을 세우는데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엄한 기강의 군기를 견디지 못하는 일부 군사가 인조반정 같은 큰 일에도 직접 뛰어들지 못한 이완 대장에 대하여 비방하는 방문을 대궐앞에 몰래 붙이기도 했다.

효종 임금은 다시 정태화를 불러 훈련대장 이완의 일을 걱정하며 의논하자 정태화 정승은 효종에게

"그동안 장수를 두려워하는 병졸들이 없다가 새 장수인 이완이 군율을 엄히 쓰는 탓으로 그러하오니 6-7개월만 지나면 그 때 가서는 군사들은 현 훈련 대장을 존경하고 그를 따를 것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 때 효종은 정태화 정승에게

"그렇게 믿어도 되오?"

라고 말하자 정태화는 효종 임금에게

"소신이 전 가족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완을 책임지겠습니다."

라고 이완을 극도로 신망하는 말을 왕에게 간청했다.

원래 장군에게는 군사들이 두려워하는 위엄도 있어야 하지만, 군사들이 그를 믿고 따를 수 있는 덕망 또한 중요한 것이다. 이완 장군은 군기를 엄하게 세우고 사병 하나하나에게 직접 신상을 파악하며 애로사항을 가능 한한 들어주었다.

그러자 차차로 병졸들은 훈련대장인 그를 아버지처럼 우러러 모시는 신뢰감과 공감대가 형성되어 아주 막강한 훈련원으로 인정받게 되자 효종임금도 그를 신망하게 되었다.

이완 대장이 수어사로 있을 때였다. 부하인 어느 병사가 무단 탈영을 하다 잡혀 군대의 규율에 따라 그는 목을 쳐야 함에

"장군, 한번만 죄를 감하여 목숨만은 건져 주십시오."

라는 청이 왕궁 안에서 들어왔다.

이완 대장의 누이가 효종비인 인선대비전에서 시녀로 있는데 누이의 손자인 홍평위 원몽린의 아내가 바로 효종의 따님인 숙경공주였다.

따라서 홍평위 원몽린이 죄를 져 옥에 갇히게 되자 숙경공주가 인선대비와 공의 누이에게 탈영한 남편을 구해 주도록 부탁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수어사 이완 대장은

"내 비록 대비의 명을 받았지만, 대비의 뜻에 맞춰 법을 어길 수 없으며 하물며 사사롭게 들어온 청탁이야‥‥‥."

누이와 함께 사가로 찾아온 공주에게 이렇게 타일러 말하며 돌려보냈다.

후에 이 말을 들은 대비도 부끄럽게 여겼고, 현종 임금은 그 후로부터 그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이완 대장은 군을 통솔하는데 이처럼 공과 사를 명백히 했으며, 부하들이 자신에게 찾아올 때는 결코 혼자 오지 않도록 엄하게 다스 렸다.

또한 이완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말만은 부하들을 시키지 않고 반드시 이완대장 자신이 관리하였다. 새벽부터 자신의 말 관리를 한 후, 보초들이 잠들지 않고 잘 지키는가를 직접 순시하면서 아울러 군사들이 편안히 잠들어 있는가도 날마다 점검하였다. 따라서 지휘관들이 언제 어느 때 대장이 예고없이 순시를 할 것인가 를 예측할 수가 없어 항상 긴장속에서 부대 안을 점검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또한 이완 대장은 직접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과 맞서 싸운 장수였다. 그래서 전쟁의 참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한사람의 군사라도 안 다치게 할 수 있을까 밤낮으로 연구해 오다가 드디어 '삼베 자루로 성을 쌓는 휴대용 호신대'를 발명하게 되었다.

훈련대장 이완은

"소신이 스무 말이나 들어가는 커다란 삼베 자루를 여러개 만들어 각기 하나씩 나눠 주고 행군할 때에는 각자 허리에 두르게 하고, 군사가 멈출때는 그 자루 에다 흙을 가득 담아 세개씩 포개어 한첩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 흙자루로 쌓아올린 첩의 높이는 사람의 키로 한길이 실히 넘어 그 안에 군사가 들어가면 족히 몸을 감추고 또 흙을 판 자리는 움푹 패인 구덩이가 되어 군사가 숨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군사가 성을 나와 들판에 진을 치고 주둔할지라도 가히 적의 화살을 막아 싸울 만한 최선의 장소가 됩니다."

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항상 연구하는 장군이었다.

이처럼 훈련대장, 공조판서, 우의정까지 지낸 이완은 정익이라는 시호까지 받았으며, 자신의 가족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오로지 나라일에만 골몰하면서 부하 들의 전술, 훈련, 건강, 복지 면까지 세세하게 챙기는 공과 사가 아주 명백한 청백리 장군이다.

그 후, 이완 대장은 벼슬 자리를 청산하고, 그의 고향인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에 낙향하여 글을 쓰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지금도 이완 대장이 살았던 가옥(충북지방 민속자료 43호)이 남아 있으니 청백리상의 위상을 우리들 가슴속에 심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