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1594∼16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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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의 보검은 반 권의 책과 같네. 중국 대륙을 향해 남아의 의기를 보여준 임경업 장군의 시조이다. 임경업은 어려서부터 병정놀이를 좋아해서 9세가 되면서부터 역사와 병서를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그러한 어린 자식을 보고 아버지인 임황이 하루는 물었다. "어찌하여 너는 장군이 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느냐?" 이를 듣고 그의 아버지는 다시 물었다. "너는 이미 장군이 되기는 틀렸구나." 이를 듣고 임경업은 부끄러워 얼굴을 못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을 하니 아버지는 기특히 여겨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다 숨진 장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들의 뜻을 가상히 여기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경업은 이 아버지의 말씀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임경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년째 되던 해인 1594년(선조 27) 평안도 개천 땅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아버지 고향은 충주 달래마을인데 한때 무인의 벼슬을 했던 그의 아버지가 임진란이 일어나자 평안도로 왕을 쫓아갔기 때문에 타향에서 그를 낳은 것이었다. 그러나 임진란이 끝나자 그의 가족은 다시 고향인 충주의 달래마을로 돌아왔다. 4형제 중 둘째인 그가 바로 아랫동생인 사업과 함께 무과에 합격한 것은 그의 나이 24세때인 1618년(광해군 10)이다. 첫 부임지는 함경도 갑산이었다. 그러나 이는 벼슬을 받고 간 것이 아니라 새로 무과에 합격한 자에게 벼슬을 주기 전에 의무적으로 국경지방에 가서 얼마동안 근무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간 것이었다. 2년 후인 1620년엔 소농보권관이 되어 군량과 군기를 구비하는 데 공을 세웠고,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자원해서 정충신 장군의 아래로 들어가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리고는 그 뒤 1626년에 전라도 낙안군수로 부임했는데 이듬해 정묘호란을 맞게 된다. 때는 이때다 하고 그는 전라도 병마절도사 밑에 있는 좌영장이 되어서 청나라 군사를 무찌르기 위하여 서울을 향해 출전했으나, 이때는 이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도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때의 한을 품고 있던 그는 북방을 지키는 검산산성 방어사로 부임하자 정묘호란 때 파괴된 용골, 운암, 능한산성 등을 다시 쌓았으며 이어 정주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조정에서는 정묘호란 때 방어하지 못한 청북(청천강 이북)을 포기하고 청천강 이남을 중시하여 특히 남한산성을 고쳐서 서울을 지키자는 주장이 나와 청북사람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때 이 반대운동을 임경업이 조종하였다하여 조정에서는 그를 탄핵했고 가두었으나 곧 그의 잘못이 없음이 드러나 청북방어사로 임명하고, 이어 안변부사를 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백마산성을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는데 얼마 후 부친의 상을 당하여 잠시 고향으로 내려와 있다가 1634년 다시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가 되어 돌아왔다. 이때 돌아온 자기를 반기는 백성들을 보고 그는 여기를 더욱 굳게 지킬 것을 결심하고 백마산성을 구축하려 했으나 워낙 사람과 물자가 없어 조정에 청하여 백금(은) 1,000냥, 비단 100필을 받아 중국 상인과 무역을 해서 재물을 모아 유민들을 모여 살게 하고 성을 쌓았으며, 이 공로로 1635년 가의대부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역거래로 지나치게 이익을 많이 챙겼다하여 그를 파직함에 이르렀는데 이때 당시 도원수로 있던 김자점이 극구 그의 복직을 주장해서 1636년 다시 의주부윤에 복직되어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산, 봉황산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방을 튼튼히 했다. 바로 그해 12월 2일 청나라가 마부대를 앞세우고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왔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그는 곧 백마산성으로 달려가 겨우 8백의 병사들을 데리고 수백 개의 깃발과 수천 개의 허수아비로 위장하고는 밤낮으로 대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게 하니 마부대는 맞싸우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피하여 서울로 진격했다. 임경업의 저지로 서울 진격은 다소 늦어졌으나 청나라는 6일 만에 서울로 쳐들어왔으며, 이로 인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 인조는 항전하다가 역부족으로 이듬해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나아가 항복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임경업은 땅을 치고 통곡했다. 그러나 청나라 태종의 조카인 요퇴가 3백 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그는 몇명의 호위병만을 데리고 가서 기습하여 요퇴의 목을 베고 잡혀가던 우리백성 남녀 120여명과 말 20여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임경업은 친명배금파였다. 즉 명나라와는 친하고 청나라는 배척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 조선에 병력을 요청해 오고 그때마다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보내지만 싸우는 척만 했지 한 번도 청을 위하여 명과 싸운 적은 없었다. 그것은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치욕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지 청나라를 굴복시켜야 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청나라에서는 임경업이 명과 손을 잡고 청을 괴롭히고 있다는 눈치를 챘지만 증거를 잡지 못하여 조선 조정에만 압력을 넣어 임경업을 파직시키도록 하는 등 괴롭혔다. 그러던 차에 1642년, 마침내 임경업의 청나라에 대한 비협조의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청이 명의 금주위 땅을 공격했을 때 명의 장군인 홍승주가 항복하자 그의 부하들이 임경업이 명과 내통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알려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형조판서인 원두표로 하여금 임경업을 붙잡아 청나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임경업은 이 사실을 알고 도망칠 때 쓰기 위해 은700냥과 승복 및 칼을 얻어 미리 숨겨 놓았고, 급기야는 붙잡혀 가닥과 11월 6일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에 이르렀을 때 밤을 틈타 도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숨겨 놓았던 승복을 찾아 갈아 입고 중노릇을 하며 명나라로 탈출할 기회를 노리면서 초막을 짓고 숨어 살았는데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독촉에 못이겨 그의 가족들을 붙잡아 청나라로 압송했으며 그의 아내 이씨는 그 이듬해 심양옥에서 자살했다. 임경업은 1643년 5월 26일 평시 그를 도와준 김자점의 종이었던 장사하는 무금이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배 한척을 얻어 사공 10명, 그리고 그의 부하 두 사람과 전부터 사귀어 온 두 승려와 함께 상선을 가장하고 마포(일설에는 태안)를 출발하여 황해로 빠져 중국 해풍도에 도착, 명나라의 도독인 황종예의 총병 마등고의 아래로 들어가 4만명의 군사를 받고 청을 치러 나갔다. 그러나 청이 이미 연경을 점령하여 명의 도독 황종예가 남경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임경업도 마등고와 함께 석성으로 가 기회를 엿보았으나 마침내는 도독과 마등고마저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 조선에서는 그를 돌봐주던 심기원이 역적모의를 했다하여 갇히게 되었는데 여기에 임경업이 관련이 되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 그는 갈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러던 차 그의 부하인 한사립의 밀고로 1645년 1월 청에 항복한 명나라의 장수인 마홍주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는데 그때 마침 청의 집권자인 예친왕이 임경업의 장군됨을 아껴 지난날을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조선의 역관인 정명수, 이형장 그리고 김자점 등이 짜고 그를 본국으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심기원의 반역모의에 관련시키려 하였다. 그는 심기원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 및 칼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으나 역모에 가담은 하지 않았다고 극력 부인하였다. 그러나 원두표와 김자점은 거짓말을 한다하여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두표는 임경업을 청나라로 압송해갈 때 도망치는 바람에 파직되었던 사람이므로 그럴만도 했지만, 김자점은 임경업이 평안병사 겸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도원수로서 그를 돌봐주고 임경업도 잘 따랐으며, 그가 파직을 당함에 이르자 그를 극구 두둔하여 형벌을 면하게 해준 장본인인 사람으로 임경업과 가장 가까웠던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임경업에게 배를 알선해 주었던 무금은 그의 첩인 매환이란 사람의 오라비였는데 임경업이 마포에서 탈출할 때 무금의 처에게 탈출 사실을 알리라고 하였으니 임경업이 살아서 문초를 받게 되면 무금의 처도 문초를 받게 되고 이때 무금의 처가 김자점에게 알렸다고 하면 김자점도 임경업의 탈출을 도운 결과가 되는고로 그렇게 되면 자기도 심기원과 같은 패로 몰려 역모죄로 죽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해 1646년 6월 20일 심기원 역모사건 관련 및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이를 시인하라고 다그치는 모진 매를 맞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숨을 거둘 때 임경업은, "나라가 오랑캐의 발 아래 있고 내가 할 일이 아직도 많은데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하는 말을 처절히 남겼다고 한다. 그의 나이 53세로 고향인 충주의 달래마을에 묻혔다. 1697년(숙종 23)에 복관되고 충주의 충렬사, 선천의 충민사, 백마산성의 현충사, 겸천의 충렬사 등에서 제사를 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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