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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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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1536∼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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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어린 초등학교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이 시조(훈민가, 단가)를 한번 읊어 보지 않았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의 이름이 송강 정철이라고 하면 또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 국문학사상 너무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문인이면서 정치가요 한학자로 이름이 널리 나 있기 때문이다.

정철의 묘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 부락 지장산에 있다. 그의 위패를 모신 송강사도 그 곁에 있다. 원래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었던 것을 우암 송시열이 이곳 진천땅을 지나다가 산세와 자연의 경치가 빼어남을 보고 명당자리라고 하여 1665년(현종 6)에 그 후손이 옮겼다고 한다.

송강(松江)은 1536년(중종 331)에 서울 장의동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집안은 큰 누이가 계림군 유(성종의 셋째 아들인 계성군의 양아들 즉 인종의 사촌)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왕궁을 자주 드나들며 뒤에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될 경원대군과 친숙하게 지내기도 한 이름난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10세 되던 해인 1545년(명종 즉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집안이 풍지박산이 된다. 을사사화란 인종이 왕이 되자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이 세도를 부리다가 인종이 8개월만에 죽고 명종이 왕이 되자 이번엔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이 세력을 얻어 윤임 일파를 역모죄로 몰아 귀양보내고 죽인 사건이다. 그런데 이때 그의 매부인 계림군이 이 역모와 관련이 있다하여 무고하게 죽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정철의 집안에도 화가 미치어 맏형은 죽고 아버지는 관북지방인 정평, 연일 등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후 5년간을 어린 정철은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다니느라 생활의 안정은 물론 공부할 기회마저 잃었다. 그의 아버지가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그가 16세인 1551년(명종 6)인데 그 길로 그의 아버지는 벼슬을 멀리하고 자연에 묻혀 살기로 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전남 창평(지금의 전남 담양군 창평면)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 가족의 이주야말로 정철에게는 대 전환기를 맞는 기회가 된다. 그간 유배생활로 잃었던 소년시절의 화려한 꿈이 모두 이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으니 이 곳 성산(담양)의 자연풍경과 성산 앞을 흐르는 죽계천인 일명 송강(松江)의 도도함은 그의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 시절을 사로잡아 훗날 '송강'이란 그의 호를 낳게까지 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청년 학자 기대승에게 글을 배우고 학문의 방법 및 출세의 도리를 인도받았으며 당시 전라도 도학의 대스승이었던 김인후와 송순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그런가 하면 그가 17세 되던 1552년(명종 7)에는 글재주가 뛰어난 시를 잘 짓는 문화 유씨강항의 딸과 혼인을 하고 이이, 성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으며, 1556년(명종 11)인 21세 때에는 양응정에게 학문을 배우고 당시의 이름난 시인인 임석천한테서 시를 배웠다. 그야말로 황금같은 창평, 성산의 세월이었다.

그의 관직 생활은 1561년(명종 16)인 26세 때 진사시 1등을 하고 다음해 27세 문과에 장원급제 하면서 시작된다. 장원급제 했을 때 왕인 명종이 방에 붙은 정철이란 이름이 어린 시절 궁중에서 같이 놀던 옛 친구임을 알고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따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고 한다.

정치가로서의 정철은 청렴결백과 강직한 성품의 대명사였다. 그가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명종의 사촌형인 경양군인 경양군이 처가(妻家)재산을 뺏으려고 처조카를 죽인 일로 해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명종이 그에게 관대히 처리할 것을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왕의 부탁이지만 법을 내세워 기어이 처형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그 후에도 여러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많은 시련을 당했다.

그가 38세로 성균관 사성이 됐을 때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때 그는 어정쩡하게 서인이 되어 휩쓸리다가 관계에 있음을 부끄럽게 여겨 사직을 하고는 창평으로 내려가 자연과 벗삼아 살면서 수차 조정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있다가 42세 되던 해 인성대비(인종의 비)가 돌아가자 곡하기 위해 대궐에 오면서부터 다시 조정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당파 싸움은 극에 달해 있었고 이 판국에 그는 서인의 중심 인물이 되어 동인과 맞섰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진도군수로 있는 이수가 뇌물로 쌀을 서인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 그 조카인 윤현네 집에 운반했다는 헛소문을 동인인 김성일이 왕이 있는 자리에서 터뜨린 것이다. 이때 아무리 그가 허위임을 밝히려 했으나 오히려 불의를 감싸준다는 탄핵만 받았을 뿐으로 그는 사직하고 창평으로 다시 내려와 버렸다.

창평 성산에 머물며 조정에 나오지 않는 정철에게 선조가 강원도 관찰사를 임명한 것은 1580년(선조 13) 그의 나이 45세 때이다. 조정이 아닌 지방이고 그것도 자연경관 좋기로 이름난 강원도이니 풍류시인으로서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쾌히 부임한다. 그리고 뜻한대로 관동의 경치를 두루 만끽하며 많은 시문을 짓고 관동의 팔경을 노래한 그 유명한 「관동별곡」의 가사작품을 남겼다.

한편 관찰사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도민들의 생활자세를 일깨워주는 노래(단가, 시조)를 지어 널리 펼치니 이른바 '훈민가'이다. 훈민가는 모두 16수로 법을 지키라는 명령이나 요구가 아니라 미풍양속의 계승발전을 타이르는 시조이다. 게다가 말들이 쉬운 우리말로 되어 있어서 백성들에게 친밀하게 전달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친절하고 따뜻한 시인 관찰사로서의 정철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이 후 그는 전라도 관찰사, 예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형조, 예조판서가 된다. 이 때 이조판서로 있는, 아주 친한 사이였던 율곡 이이가 동인들에게 무수히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힘을 다해 변호했는데 결국 이율곡은 나이 49세 때 죽고 말았으니 그의 정치에 대한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결국 또 향리로 내려갈 것을 결심하고 왕께 아뢰었으나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오히려 귀한 말(총마) 한 필을 내려주면서 이 말을 타고 대궐에 드나들도록 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달랬다. 이로해서 '총마어사'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했다. 그러나 왕이 정철을 믿고 두둔하면 할수록 동인등의 모함은 더욱 거세지고, 마침내는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또 다시 시골로 내려가 4년여(50세-54세)를 고양, 신원, 창평에 머물며 세상을 비관하면서 실의에 빠진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정철의 작가 생활로는 아주 귀중한 시기였으니 이때가 없었던들 그의 주옥같은 가사, 시문 등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 유명한 그의 가사 작품 5편 중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과 그의 시조작품 84수 중의 대다수가 바로 이 무렵 지어졌던 것이다. 우리가 정철이라고 하면, 그 파란많은 당대의 대 정치가요 깊은 학문의 대 한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문학사상 시가문예의 제1인자로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 무렵에 지은 작품들로 인하여 서이다.

1589년(선조 22)에 큰 아들의 상을 당하고 고향에 와 있을 대 마침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이었으나 수찬 벼슬에 있으면서 세력을 잡고 있는 동인에 아부하여 스승인 이율곡을 비난하고 배반하므로 왕이 불쾌하게 여기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간 사람인데 그후 사람을 모아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

는 소문을 퍼트리며 모반을 계획하다가 거사직전에 발각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정철이 궁궐로 달려갔더니 선조왕이 충절을 가상히 여기고 우의정으로 임명하면서 이 사건을 다스리도록 하여 동인의 우두머리격인 이발, 이호, 백유양 등을 처형시키니 이것이 기축옥사이다. 그런데 이게 또 화근이 될 줄이야! 다음 해엔 동인인 이산해가 영의정이 되고 정철이 좌의정이 됐는데 같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해놓고는 이산해가 왕의 뜻이 신성군(선조의 넷째 아들)에 있음을 알고 왕세자를 정하는 날 병을 핑계로 빠지고 정철이 혼자 왕께 광해군 책봉을 건의하니 왕이 노하여

"사직을 물려 받을 왕세자의 일을 그대가 함부로 처리하려 하는가?"

하고 불호령을 내리고는 그를 명천, 진주, 강계로 귀양보냈다. 이는 기축옥사 때 당한 동인의 보복에 걸려든 것이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이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개성에 머물고 있는데 백성들이 정 정승(정철)의 석방을 간청하고 대신들 중에서도 사면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 그 자리에서 석방을 명하니 정철이 통곡하고 곧 왕께로 달려가 체찰사(군의 일을 맡아보는 벼슬)의 일을 보다가 이듬해 사은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명나라에 가서, 보내준 응원군에 감사하고 계속 지원해 줄것을 요청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쇠약해진 늙은 몸으로 수천 리 길을 어렵게 다녀오니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철이 명나라에 가서 왜군이 오래 전에 물러 갔으니 응원군을 더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의 모함이었다. 그는 벼슬에 대한 더 이상의 미련을 훌훌 떨쳐 버리고 스스로 조정을 떠나 강화도 송정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달 후인 1593년(선조 26) 12월 18일, 58세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원통함이 풀어지고 관직을 되찾았으며 숙종 10년엔 왕은 문청(文淸)이란 시호를 하사했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호천서원, 진천의 송강사에서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