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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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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응(1918-1951)
내용   인물 이미지 없음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아무리 일제가 우리의 성씨를 없애서 그들의 민족으로 바꾸어 보려고 이른바 '창씨개명'을 강요 했지만 우리 민족은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이지 결코 변할 수가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는 그 유명한 동요 「감자꽃」이다. 이 감자꽃의 시인 권태응은 1918년 4월 20일 충북 충주시 칠금동(옷갖)에서 출생하였으며, 8세까지는 한학자인 조부한테서 한문을 배우다가 9살 때 충주 공립보통학교 (지금의 교현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하여 학교에서 1,2등을 다투는 모범 학생으로서 한번은 숙제로 낸 사적 조사보고서를 잘 써내 전교생이 모인 조회시간에 발표되기도 했다.

1932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올라가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 는데 이 학교는 지금의 경기고등학교로 당시 수재만 모인 명문학교였다. 여기서도 그는 각 과목에 걸쳐 성적이 좋았는데 그 중에도 문학에 특출한 재능 을 보였으며 음악과 체육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싹터 있던 그의 반일의식이 이 때 더욱 강렬해져 일본 사람들 의 주목을 받았으니, 한 장의 사진 사건은 유명하다. 그가 3학년이 되던 어느 봄날의 일이다.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얼마 안되는 북악산에 놀러 갔다. 그런데 허위허위 정상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탁 트인 서울 시가지 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먼 곳도 아닌 바로 발아래 벌레처럼 도사리고 있는 총독부 건물이 보이는게 아닌가. 그는 반사적으로 울분이 왈칵 솟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큰 바위를 번쩍 들어올려 그쪽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이 장면을 같이 간 친구가 찰칵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은 그의 책상 서랍 속에 깊숙이 묻혀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당시 그는 학교 근처인 재동의 당숙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 당숙 집에 협박장 사건이 일어나 왜경이 가택 수색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수색과정에서 그의 그 사진이 발견되었다. 괴이한 장면의 사진에 대해 왜경이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급기야 그 장면의 발단과 원인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는 문초 과정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고 학교도 퇴학의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워낙 성적이 뛰어나고 모범생인 그였기에 평소 그를 아끼던 담임과 교장이 적극적으로 그를 두둔하고 친구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가까스로 퇴학은 면하기에 이르니 아직 고보생 이었던 그로서는 크나큰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달래고 오래 전부터 병으로 누워 계신 부친을 뵈올 겸 오랜만에 고향인 충주 옷갖 마을로 내려왔다. 그러나 예상외로 부친의 병환이 악화되어 있어 절망에 빠지게 되는데 그가 싹틔어 놓은 마을의 야학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 많은 위안을 얻게 된다. 당시는 농촌계몽운동이 한창 이던 때로서 고보생, 대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농촌으로 돌아가 근로봉사, 의료봉사 및 문맹퇴치운동에 적극 앞장섰는데 권태응도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 와 야학생을 모아 가르쳤던 것이다. 이 야학일을 시골에 있는 친구들이 계속 잇고 있던 참에 그가 내려갔으니 그에 대한 환영과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었다. 그는 다시 활기를 내어 야학일에 몰두했다. 그가 서울에 있으면서도 시골의 야학생들을 위해 틈틈히 지어 두었던 동요를 가지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책자랑」이다.

할아버지 책 자랑은 어려운 한문책
그렇지만 그것은 중국의 글이고‥‥‥
아버지의 책 자랑은 두꺼운 일본책
그렇지만 그것은 일본의 글이고‥‥‥
언니의 책자랑은 꼬부랑 영어책
그렇지만 그것은 서양의 글이고‥‥‥
우리우리 책자랑은 우리나라 한글책
온 세계에 빛내일 대한의 글이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 글의 우수성이 담뿍 담겨 있는 노래다. 이렇게 그는 어린이들에게 애국심과 자긍심을 심어 주기에 노력했다.

학생의 몸으로 오래 있을 수 없어 그는 아버지의 병환에도 불구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울로 올라와서도 그의 마음은 고향과 고향의 어린이들에게 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문화적인 갈증으로 메말라 있는 고향과 고향 사람들을 위해 연극을 보여주기도 하고 친구 염홍섭(사진 사건 때 사진을 찍어 준 친구)과 「자명고」의 대본을 마련하여 고향으로 내려 와서는 동네 젊은이들과 함께 소인극을 꾸며서 추석을 즈음하여 막을 올려 동네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가 제일고보를 졸업한 것은 1937년이다. 그는 진로를 정하기 위해 담임 선생을 찾아갔다. 담임선생은 사진 사건 때 극구 변호해 준 분으로 그에게 각별히 관심을 갖고 지도해 주었던 것이다. 선생님과 진지한 상의 끝에 그는 일본으로 유학 갈 것을 결정하고 그해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문학과에 입학 한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 가서도 일본에 대한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항일 운동을 하다가 결국엔 일경에 붙들려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중퇴 후에도 그는 재일 유학생을 모아 독서회를 조직하여 계속 항일 운동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여러 차례나 왜경에게 붙들려 곤경을 치렀고 급기야는 소압형무소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폐결핵에 걸렸다.

병이 깊어지자 왜경은 그를 석방시켰다. 1940년 6월이다. 그 길로 그는 귀국하여 황해도와 인천 등지로 요양길에 나섰고 점차 건강이 회복되자 고향 으로 돌아와 동요짓기에 몰두하였다. 「고추밭」「율무」「옹달샘」등 그가 남긴 30여편의 동요 중 21편이 그 무렵에 탄생된 것들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토속적 정서가 담겨 있고 항일의 뜻이 숨어 있는 애국시가 대부분이다.

그는 한편으로 야학을 계속하여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항일 정신을 심어 주었으며 또한 소인극도 자주 상연하여 농민들과의 화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무렵 결혼도 해서 남매까지 두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 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광복직후까지도 그만했던 그의 병세가 점차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일에 욕심이 많고 작품에 골몰하다 보니 건강 관리가 뒤로 밀려났던 것이다. 그래도 6·25전까지는 약으로 지탱을 해 나갈 수 있었지만 6·25후에는 전쟁의 혼란중에 약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1951년 3월 28일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나이 33세 너무도 아까운 나이,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충주시 금릉동 광명산, 속칭 팽고리산에 묻혔다. 그리고 그로부터 17년 후인 1968년 5월 5일 제86회 어린이날에 그의 대표작 「감자꽃 노래비」가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에 세워졌다.

그의 제일고등보통학교시절의 동기생인 이해곤씨가 앞장선 노래비건립회와 새싹회의 윤석중씨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