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영(1908-196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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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민문학의 선구자이자 제1인자인 이무영, 그는 1908년 충북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 오리골에서 태어나 1913년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로 이사했다. 본명은 용구(龍九)이다. 어릴적부터 작가를 꿈꾸던 그는 1920년 용문학당을 마치고 12세에 휘문 의숙에 입학하지만 도중에서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조오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문적인 작가 수업을 하고자 학교를 중퇴하고 당시 이름 날리던 일본 소설가 가도다께오를 찾아가 그의 집에 살면서 소설 공부를 했는데 2년째 되던 해인 1926년 19세의 이른 나이로 장편소설 「의지없는 영혼」을, 이 이듬해엔 「폐허」를 출판하여 소설가로서 입신하였다. 그가 가도다께오 아래서 문학수업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4년 만인 1929년 이다. 귀국하여 그는 소학교(초등학교) 교원생활을 하면서도 작품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설 「반역자」는 1931년 작품이다. 그러다가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하게 되는 것은 1932년 동아일보에 중편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과 단편 「B녀의 소묘」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구인회' 동인으로 활약한 것은 그 이듬해이다. 구인회는 1933년 8월에 결성한 친목단체 로서 이태준, 정지용, 박태원, 김기림, 이상, 이무영, 유치진, 김유정, 조용만 등이 그 회원이다. 이 무렵 단편 「류바쉬카」를 발표하고 1934년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 했다. 그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장편 「먼동이 틀 때」를 비롯하여「용자소전」「취향」등의 단편을 발표하고 한편으로는 희곡 「톨스토이」도 내놓았다. 그는 연극에도 관심이 커서 '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가 활약을 했던 것이다. '극예술연구회'는 1931년, 해외문학파로 불려지던 서항석, 김진섭, 장기제, 이하윤, 조희순, 최정우, 정인섭, 유치진, 함대훈, 이헌구, 김광섭 등과 연극인 홍해성, 윤백남 등이 조직한 신극단체인데, 극예술의 연구와 실험무대를 통하여 우리나라 신극발전에 크게 기여한 단체였다. 이때까지를 문단에서는 이무영 문단생활의 초기라고 보는데, 이 시기의 작품 에는 무정부주의자적인 반항의식이 깔려 있었다. 이것은 그가 카프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다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되고 그는 1933년년 발행 하여 그 무렵 발표면에서 가장 뚜렷한 실적을 올리고 있던 문예지「조선문학」 으로 자리를 옮겨 주간을 맡아 활약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흙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경은 작품 속에서 농촌의 피폐함과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에 늘 안타까움과 분개함을 표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한다. 1939년은 그의 작품 세계에 일대 전환기를 맞는 해이니, 도시의 잡다한 띠끌을 떨어 버리고 경기도 군포 근처 시골에 가족을 데리고 미련없이 들어간 것이다. 그가 이주한 곳은 '궁촌'이라는 마을이었다. 여기서 그는 1951년 1·4후퇴까지 16년 동안을 농민과 더불어 직접 농경생활을 하면서 이를 토대로 한 농민소설 창작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의 「제1과 제1장」과 1940년의 「흙의 노예」는 이때 얻은 빼어난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인 동시에 우리나라 농민소설의 명편으로 손꼽힌다. 그는 이 작품에서 농경의 신성함과 농민의 성실한 삶을 예찬하고 있으며 아울러 당시 농촌의 참상을 묘사하고 있고, 농촌의 피폐한 원인을 캐 보려 하고 있다. 여기 「제1과 제1장」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온 집안이 깨고 뒤미처 김영감도 달려들었다. 영감의 손에는 지겟작대기가 쥐어져 있었다. 도둑놈도 그랬고 수택이도 그랬고 온 집안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몽둥이에 맞을 사람은 그 도둑이리라고, 그러나 아니었다. 지겟작대기에 아랫도리를 얻어맞은 것은 아들이었다. 수택 자신도 그랬고 도둑도 그랬을 거고 집안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것은 영감이 흥분한 나머지 잘못 때린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수택은 얼른 피했었다. 피하고는 안심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김노인의 작대기는 아들 에게로 향하고 겨누어졌다. "이 몰인정한 녀석! 내 물건 도둑 안맞았으면 그만이지 사람은 왜 친단 말이냐! 응 이 치운 겨울에도 도둑질하는 사람은 여북해 하는 줄 아느냐? 우리네 시굴 사람은 그런 법이 없다!" 도둑은 울고 있었다. 도둑의 등에는 쌀 한말이 짊어지어졌다. 이튿날 수택은 지리할 만큼 긴 설교를 듣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람이란 법만 가지구 사는게 아니니라. 법만 가지고 산다면야 오늘날처럼 법이 밝은 세상이 또 어디 있겠니. 법으로만 산다면야 법에 안걸릴놈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넌 법에 안걸리는 일만 하고 사는 상싶지? 그런게 아니니라. 올 갈에두 기다무라란 사람의 과수원에서 사괄 하나 따 먹다가 징역을 갔느니라. 남의 것을 따는 건 나쁘지. 나쁘기야 하지만 그게 징역갈 죈 아니지. 어젯밤 일을 본다면 너두 네 과일밭의 사괄 따면 징역 보낼 사람이 아니냐. 너 어제 그게 누군 줄 아냐? 모르는 체하기 했다만, 내 저 아버진 잘 안다. 알구 보면 다 알만한 사람야. 시굴서야 서루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모두 한 집안 식구거든‥‥‥ 사람 사는 이치가 다 그런게란 말야!" 이 시기에 그는 장편 「향가」「세기의 딸」그리고 그의 궁촌생활을 담담 하게 써내려간 「궁촌기」를 발표했다. 그의 활발한 작품활동과 우수한 문학성 이 인정을 받아 1943년엔 장편 「청기와집」으로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한국문단엥 소설가로 확고한 자리를 굳히고 명성을 얻은 그는 1946년 서울대학교에도 출강, 소설론을 강의하면서 「소설작법」도 썼다. 그후 1950년엔 그의 또 하나의 역작인 장편「농민」을 내놓았다. 그리곤 6·25를 맞고 이듬해인 1951년 전시 중엔 소설가 염상섭, 윤백남과 더불어 해군에 입대하여 정훈장교로서 정훈교육을 맡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1953년 「농군」, 1954년 「노동」등 장편 농민소설을 발표했는데, 이들 장편에서는 농민들의 역사적 수난과 항거를 서사적으로 그려 내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그의 문학적 방향을 바꾼다. 1955년 「숙향의 경우」 1958년 「계절의 풍속도」등을 비롯, 「비련」,「송미망인」,「창」등에서는 주로 애정문제를 다룬 것이다. 단편 「시신과의 대화」,「아침」도 이때 나왔고 희곡 '팔각정 있는 집'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농부전초」로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는다. 한편 숙명여자대학교와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하면서 문총 최고위원으로도 활약했다. 농민소설에 있어 단연 독보적인 이무영은 천재형이기보다는 노력형의 작가로 알려져 잇으며, 건실한 작품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 성실하고 중후한 작가 였다. 애석하게도 4·19 이틀 뒤인 1960년 4월 21일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문총장으로 치러졌으며, 묘소는 수유리에 있는데, 그의 고향인 음성군 음성읍 설성공원에 '이무영 문학비'가 세워졌다. 1994년에 음성군과 문화원이 '무영제'를 제정, 제1회 무영제가 1994년 4월 20일에 음성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되었으며 그를 추모하는 시낭송 및 백일장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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