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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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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1903-?)
내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하살을 찾으려 풀섭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향수」이다.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이 시는 노래로 더 유명해졌다.

그는 1903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이곳 고향에서 보냈다. 그가 문학에 눈뜬 것은 1920년대초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등학교) 시절 박팔양과 함께 문학수업을 하면서부터인데 이 때 그들은 외국 시인들의 작품을 읊조리고, 시 습작을 하면서 동인지인 「요람」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무렵엔 습작기를 넘어서 나름대로의 시세계를 펼쳐 보이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심오하게 표현했다는, 또 뛰어난 감각과 언어미로 완벽 하게 형상화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위에 적은 그의 「향수」가 바로 이 무렵 쓰여졌던 것이다. 이 작품이 완성되기는 그가 일본의 도지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후라고 하니 1923년경이 된다. 그의 나이 22세 때이다.

일본 유학시절인 1926년 「학조」지 1호에 시 '카페프랑스'와 '슬픈인상화', 「신민」지 19호에 '달리아'를 1927년 「신민」지 22호에 '이른 봄 아침', 「조선지광」지 64호에 '바다'를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연이어 「조선지광」65호에 바로 '향수'를 발표한다. 앞에서 말한 바 '향수'는 1923년 에 쓰여졌다 했으니 4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시절의 작품들은 신선한 감각과 이미지를 보여 주었다는 것과 모더니즘의 실험적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 면서 시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모더니즘이란 현대주의 또는 근대주의 라고 번역되는 것으로서 기성 도덕이나 전통적 권위에 반항하여 도시적이고 근대적인 감각으로 회화적인 이미지를 중시하는 풍조(사조)를 말하는데, '향수','카페프랑스'가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한국 현대시의 새 장을 열어 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지용의 이러한 시단의 공헌에 대해 정지용을 연구한 한 대학교수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 서린 한의 정서를 우리의 목소리로 발성한 최초의 현대시인 이 바로 정지용이다. 우리 언어의 깊은 광맥을 찾아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 구사로 대상의 이미지를 선연하게 형상화하여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 보인 공적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1929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의 교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문학할동으로 들어선다. 1930년 시인 박용철이 자금을 내놓아 창간된 시 전문지인 「시문학」에 박용철, 김영랑, 변영로, 이하윤 등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하여, 창간호에 '이른봄 아침'을 비롯하여 '경도압천'과 '선취', 2호에 '바다','피리','갑판 위','저녁햇살','홍춘','호수1·2'등을 발표했다. 이 때 그의 작품은 감상적이거나 언어의 유희가 아닌 섬세하게 잘 다듬어진 언어로 구사되는 서정적, 감각적인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다. 곧 그는 한국 문단 의 주류가 되기 시작한 순수시의 모태가 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그는 1933년 「가톨릭청년」지 창간에도 참여 하여 편집에 관여하면서 1934년 10호까지 '해협의 오전 2시','비로봉','임종', '시계를 죽임','다른 한을','또 하나 다른 태양','불사조','나무'등, 한국 기독교 시 문학사에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신앙시를 발표하였다. 특히 이 때 '날개'의 작가 이상을 「가톨릭 청년」지에 참여시켜 작품을 발표하게 하기도 했다. 또 1939년 「문장」지를 통해 조지훈,박목월,박두진 등을 추천 하여 이른바 청록파를 탄생케 한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그는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 잃은 허무와 절망감이 컸을 때를 살면서 따뜻 하고 평화스러운 조국을 그리워하는 시 '고향'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 꿩이 알을 품고/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 높푸르구나.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의 교원직을 내놓고 신문사로 들어가 경향신문 편집국장과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런데 정부수립 이후 그가 좌익으로 전향했다는 설이 떠돌았다. 그리고 1950년 한려수도를 여행 중 6·25를 맞아 서울로 부랴부랴 올라왔는데 그 길로 북한군에게 붙잡혀 북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이걸 놓고 납북이냐, 월북 이냐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오랜 문우들이나 친구들은 월북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좌익으로 전향했다는 설은 그의 절친했던 문우가 그쪽의 중책을 맡았었기 때문에 일어난 소문이라는 것이고, 또한 착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가 그쪽으로 기운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는 그 후 소식이 끊겼으며 그의 이름과 함께 그의 작품은 그늘 속으로 뭍혀 버렸다. 그러다가 1988년 마침내 해금되니 실로 40여년 만이다. 해금과 더불어 그의 이름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지용회가 결성 되고, 이 지용회와 옥천문화원이 주축이 되어 옥천 체육공원에 그의 시비와 흉상이 건립됐으며, 모교인 지금의 죽향초등학교에 기념표지판도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지용 문학상'도 제정되었는가 하면 해마다 '지용 문예 백일장' 도 열린다.

그의 시는 「정지용 시집」(1946)에 89편,「백록담」(1941, 1946)에 33편이 수록되어 있고, 번역시 5편이 있으며 산문집인 '산문'에는 미국 시인 휘트먼의 시 1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시 번역은 정확하고 높은 수준이라는 정평이 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