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꿈을 키우는 나무,
우리는 충북의 미래입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충청북도 도청

자랑스런 충북인

자랑스런 충북인 상세보기 - 제목, 내용 제공
신팔균(?-1924)
내용 ""

한말의 무관이자 항일독립운동가였던 신팔균은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에서 신석희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한성부 판윤을 지낸 신정희의 양자가 되었다.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동천(東川)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했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봉사심도 남달리 뛰어나 이웃의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는 학문에 정진하는 것보다도 군인이 되어 일제와 직접 싸우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군관학교 제1기생으로 입대하여 군정위로 중대장에 복무하다가 1907년 8월 한국군대가 강제 해산당하자 할 수 없이 고향인 진천군 이월면으로 돌아와 사립 보명학교(普明學校, 현 이월국민학교)를 설립하여 3년간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신학문을 지도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1909년 뜻한 바 있어 학교를 아우인 가균, 필균 등에게 맡기고 애국 청년으로 조직된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보다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1910년 항일합방이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조국 광복을 되찾자는 일념으로 만주로 망명하여 시베리아, 북경, 상해 등지를 전전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는 1918년 봄, 동 만주 길림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국내의 기미독립선언보다 앞서 김좌진, 서일 등 39인의 이름으로 무오독립선언을 선포하여 우리 민족은 자주민족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만천하에 공포하였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독립만세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을 진동시켰고 애국지사들의 붉은 피가 온 산하를 붉게 물들일 때, 그해 4월 그는 서로군정서의 교관으로 지청천, 김경천 등과 함께 군사훈련을 지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그 해 5월에는 적극적인 무력인 양성을 목적으로 발족한 남만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발탁되어 독립군 양성에 헌신하였다.   

 "우리는 비록 약소 민족이지만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발전해 온 문화민족이다.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우리들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힘을 기르자! 독립을 찾자! 그래서 온 국민을 일제의 사슬에서 구하자! 이것이 바로 우리의 책무이며 실현해야 할 과업이다." 라고 무관학교 학생들을 앞에 놓고 독립운동의 필요성과 당위성, 우리의 각오 등 젊은이들의 폐부를 찌르는 열변을 토했는데 그의 연설은 애국 청년들의 가슴에 조국애를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신흥무관학교의 훈련과정은 하사관반 3개월, 장교반 6개월, 특별반 1개월의 기간으로 정하고 매일 14시간의 훈련을 실시하여 학과 1할, 교련 2할, 민족정신 6할, 건설 2할의 비율로 시간을 배정하였다. 이렇게 치밀한 교육계획이 애국 청년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어 입학생들이 날로 늘었고 또 학교운영에 필요한 재정 지원자도 계속 증가하여 학교가 원만히 운영되었으며 1920년 8월까지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수가 2천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실로 신흥무관학교의 경영은 전 만주교포들의 피맺힌 정성으로 운영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장사하는 교포들, 농사짓는 교포들이 조금씩 모아온 정성어린 성금, 독지가들의 지원금 등은 학교 운영의 밑거림이 되었다. 이러한 교포들의 정성으로 수많은 독립운동 간부들을 배출하였으며 실로 이 하교가 우리의 독립운동 사상에 끼친 공로는 막대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 졸업생은 후에 신흥학우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20년 일본군의 만주 교포 대학살 사건이 있은 후 만주의 각 독립운동 단체는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통합 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1922년에 각 단체 대표들이 한곳에 모여 논의한 끝에 지금까지 분산되었던 단체를 통합하여 통의부라는 민족단일의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이때 통의부 군정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군사관계의 책임을 지고 왜적과 수십 번 교전하여 남만주 전역에서 크게 활약했고 국내에서 일본기관 및 일제 앞잡이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 당시 병력은 8개 중대와 2대 독립 소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24년 홍경헌 이도구에서 사관들에게 야외훈련을 시키던 중 마적떼로 위장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그때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부하들에게 "정의의 죽음을 택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비보를 접한 부인 임씨는 태중인데도 음독자결하였고 장남 현충은 낙양군사학교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관여하던 중 부친의 비보를 듣고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투신 자결 하였다. 이처럼 신팔균은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만주의 교포들에게도 민족혼을 불어 넣는데 모자람이 없는 애국지사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