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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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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1883∼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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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는 한말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로 1883년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에서 한진영의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요, 호는 청암이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발하고 용맹스러웠으며 지략이 있어 동네 아이들과 놀이를 할 적에도 항상 대장노릇을 하였으며 17세부터 명포수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한번 마음먹은 것이면 꼭 실행하고야 마는 행동파이기도 하였다.
   

그의 진취적인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번개대장"이라는 별명으로 부를 정도였다.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후 그는 의병장 김규환을 만난 것을 계기로 의병에 가담하였다.    

1907년 고향인 청주에서 대일항쟁의 의병을 일으켜 4년 동안 의병대장으로 충청도, 강원도 등에서 전투를 벌려 일본군 사살 70여명, 무기 노획 80여점, 현금탈취 77만원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용맹한 투지의 결과였다. 또 그해 8월 진천군 문백면에서 악독한 행동으로 진천군민을 괴롭혀 군민의 원성을 산 일본헌병 중위 '도기선치'등 3명을 사살하고 그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약 30여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번개같은 게릴라 작전으로 괴산 유목리 싸움에서 왜군 8명을 사살하고 탄환 5상자, 식료품 50점을 노획하였으며 이어 미원전투, 낭성의 가래올 전투에서 크게 이겼으며 장호원, 횡성등으로 출몰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월에는 초정리로 세금을 수송하는 일본군 호위대를 기습하여 대장 이하 3명을 사살하고 현금 77만원과 총기를 노획하였고 동년 8월에는 미원 옥화대에서 단신으로 일본군 헌병 8명과 싸워  2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격되시켰으며 10월에는 고향인 세교리에서 일본 헌병 수십명과 교전하여 12명을 사살하고 많은 총기와 탄약을 노획하였다.    

무적장군이란 별명을 가진 그는 1909년 청원군 초정리 전투에서 일본군 중대장 이등장차랑을 사살하고 보급 무기와 탄환을 탈취하였는데 이때 이등장차랑을 사살한 초정리 약수터 뒷산 바위를 지금도 '함봉수바위' 라고 부르고 있어 그의 행정을 익히 알 수 있다. 이같은 백전백승의 무적용장이지만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문경세재의 싸움을 마지막으로 부하 장졸을 이끌고 속리산으로 입산하였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다음해 2월 중국 상해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가 어느 선교사 집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던 중 불행하게도 남대문역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곧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후 일제의 소위 합방대사령으로 출옥하게 되는데 출옥후에도 고향에 머무르지 않고 눈을 피하여 서울을 왕래하면서 애국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의암 손병희와 밀회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3월 7일 청주 장날을 기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인 세전거리에서 선언서를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불러 청주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청주지역에서도 만세소리가 사방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3월 11일에는 괴산에서, 4월 2일에는 세교리 장터에서 내수 보통학교 학생과 주민들이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한봉수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경찰서 유치장을 사랑방처럼 출입할 정도로 여러 차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조국 광복의 불타는 애국정열은 조금도 사그러지지 않고 꿋꿋하였다. 굳은 신념과 의지만으로 일본경찰과 싸워온 투지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고 한봉수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렇지만 조국광복 후에도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청주 내덕동에서 청빈하게 살다가 1973년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유해는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에 안장되었다.    

청주시 중앙공원과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에 공적비를 세워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만대에 기리고 있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