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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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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1870-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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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은 1870년(고종 7년)에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말에서 학자 이행우(李行雨)공과 모친 벽진 이씨(碧珍 李氏)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본은 경주요. 호는 보재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비범하여 인근 사람들을 경탄케 하였다. 1876년 동부승지 이용우 공이 아들이 없어서 후대를 찾고자 친척들이 모여 사는 진천 초평으로 내려왔다가 아이들이 놀이를 하고 있는 중에 제일 영특하고 재주가 있어 보이는 아이가 있어 염탐해 보니 행우공의 아들임을 알고 즉시 그 집에 가서 상의하여 양자를 삼게 되었으니 보재는 그때 나이가 7세였다. 이용우 공의 양아들이 된 보재는 한성부 남부 장동 장박골(현 회현동)로 올라와서 한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가 13세 되던 1882년(고종 19) 4월에 양아버지 용우공과 생부 행우공의 상을 연이어 당했고 그 다음 해에는 생모마저 작고하여 어린 상설에게 더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주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하는 모습을 조상하러 온 조객들의 마음까지도 슬프게 하였다. 16세 때 참판 서공순의 장녀와 결혼하고 장동에서 정동(현 명동)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학은 물론 신학문인 정치, 경제, 법률, 수학, 물리, 화학, 철학, 국제법, 종교 등 모든 분야를 공부하였다. 이때 마침 미국인 선교사로 고종황제의 고문으로 와 있던 헐버트박사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영어, 일어, 라틴어 등 서구 신학문의 지도를 받았다. 또한 외국의 신간서적을 널리 구입하여 숙독함으로써 정치적 식견을 넓히고 천문과 점술까지도 배웠는데 당시 그가 탐독하였던 천여권의 서적은 지금 국회도서관에 보존되고 있다.    

그는 1894년(고종 31) 25세 되던 해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인 갑오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어 세자 시독관이 되었다. 1896년(건양 1) 1월에 성균관 교수겸 관장에 임명되더니 2월에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전임되었다. 이어 학부협판, 법무협판을 거쳐서 1905년 (광무 9)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그즈음에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켜 전쟁을 핑계삼아 조선에 대한 본격적 식민지 경영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바로 황무지 개척권의 요구인데 황무지 개척권이란 전국의 황무지에 대한 경영권과 개간 후  그곳에서 농산물을 재배·수확하는 권리 또 가축을 기르고 고기를 잡아 들일 수 있는 권리등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를 물리치지 않으면 국권을 지킬 수 없으며 황무지 개척을 자국민이 하지 않으면 국민경제와 국가재정을 파탄에 몰아넣어 민족이 멸망하게 될 것이므로 기필코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의 간곡한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의 뜻에 쫓아 보국안민을 위한 보안회가 서울에서 소집되고 일제침략에 대한 규탄대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결국 일제는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철회하면서 한국정부로 하여금 보안회를 해산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보안회는 명칭을 바꿔 대한협동회로 하고 그는 회장에 올랐다.    

1905년 11월 7일 수옥헌에서 일본군인이 감시하는 가운데 이토오히로부미의 주재하에 강제로 대신회의가 열려 이완용, 박제순 등 오적의 찬성으로 조약체결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대신회의의 실무책임자인 참찬이었으나 일본 헌병들의 제지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 조약이 아직 고종의 인준을 받지 아니한 것을 알고 "황제께서는 순사직의 결심으로 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해야 된다."는 건곡한 상소를 수차례 올렸다.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져 가는 대세를 막기에 그의 힘은 역 부족이었다.    

같은 해 11월 30일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분개감과 조약체결을 막지 못한 책임감에 민영환 공이 순국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종로 거리로 나와 시민들이 많이 모인 앞에서 통곡하면서 대한민족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일본에 결사적으로 항쟁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 뒤 이리 뒹굴고 저리 부딪히며 자결을 하려 하였으나 시민들의 만류로 실패하고 말았다.    

1906년(광무 10)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 등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고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올랐다. 상해를 거쳐 노령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다가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교포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항일 민족 교육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07년(융희 1) 7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 등과 함께 밀사로 파견되었다. 그를 중심으로 한 밀사들은 고종황제의 친서를 러시아  황제에게 전달하고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우리 밀사들은 미국인 헐버트와 협력하여 네덜란드 정부에 회의 참석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한일협약은 각국 정부가 승인하였으므로 외교권이 없는 한국대표의 참석과 발언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제 우리 밀사 파견을 안 일본 외무성이 헤이그의 일본공사에게 한국회의 참석이 거부되자 단식하던 이준은 분통함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이역만리 타국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때 본국에서는 일제의 강압으로 궐석재판이 열려 그는 사형이 선고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생겨났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그는 연해주 간도 등지에 살고 있는 한민족을 모은 뒤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하여 한일합방의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성명회의 목적은 대한의 국민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13년 이동휘, 김립, 장기영 등과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기도 하였고 1914년에는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광복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16년 47세에 불행하게도 피를 토하는 중병에 걸리어 회복의 기미가 없자 임종을 지키고 있던 이동녕, 백순 등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선광복을 이룩하라. 나는 조선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니 고혼인들 무슨 낯으로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라, 내몸과 유품을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으니 때는 1917년 3월 2일이었다. 그는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역만리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한많은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동지들이 모여서 아무르강가에 화장하였고 생전에 써놓은 유고도 모두 불태워 그 재를 강에 띄워 버렸다.    

선생은 가셨지만 조국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 정신과 애국심은 영원히 후세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귀감이 될 것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75년 5월 31일에는 진천읍 남산골 숭열사에 존영을 봉안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