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화(1869-19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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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압기에 오직 나라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외국어 교육과 여성교육을 주창했는가 하면 우리 한국사를 연구하기 위해 집안의 종교인 가톨릭을 불교로 개종하기까지 했던 선각자가 있다. 이능화이다. 이능화는 1869년(고종 6) 1월 19일 충북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에서 출생했다. 3남매 중 장남이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선교사로부터 교화를 받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분동교회'를 세우기까지 했다. 이능화는 어려서는 고향 마을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1887년 20세가 되던해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오고부터 신학문을 접하기 위하여 불어,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외국어 습득에 온힘을 기울였다. 이는 격동하는 당시의 나라 안과 밖의 정세를 알고 국제문물에 하루바삐 접하기 위해서였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보니 자신과 나라가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 던 것이다. 1887년 정동영어학당에, 1892년 한어학교에 그리고 1895년에는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법어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남달리 성적이 뛰어난 우리나라 사람으 로는 처음으로 졸업하기 전에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의 나이 30세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중국어도 잘하고 중국사람과 거리낌없이 대화할 정도였다 는 것이다. 이런 그의 외국어 실력때문에 외국사람과의 친교는 물론 외국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외국의 풍습, 풍물 등을 알 수가 있어서 우리 것과 비교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었다. 1905년엔 일어야학사에 들어가 일어 까지 배우니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하여 이로 인해 1906년 10월엔 한성법어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07년엔 정부의 특명으로 3, 4월 두 달간 일본의 관청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그 해 7월엔 국문연구소 위원직을 맡아보았다. 그러다가, 1908년에 법어학교, 영어학교, 일어학교 등이 하나로 통합하여 관립 한성 외국어 학교로 학제가 개편되었는데 이 때 학감으로 취임하여 1911년 학교가 일제에 의해 문을 닫게 될 때까지 외국어 교육, 특히 프랑스어 교육을 통해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외국어 학교가 본의 아니게 문을 닫게 됐으나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신학문과 우리 학문에의 열정이었기 때문에 그는 1912년 따로 사립 보통학교인 '능인학교'를 설립했는데 '능'은 자신의 이름에서 딴 것이고 '인'은 부인(정인호)의 이름에서 딴 것이었다. 기독교 집안의 장남인 그가 한일합당 전후에 일기 시작한 불교계 계몽운동의 흐름을 타고 불교로 개종하여 1915년 30본산의 주지와 50여명의 신도가 중심이 되어 서울의 각황사에서 조직, 발족된 불교진흥회의 산파역을 하였는데 이때 젊은 승려들의 추대를 받아 불교진흥회의 간사로 취임하게 되었으며 1917년부 터는 이사직을 맡아보기까지 했다. 이때 그는 「불교진흥회 월보」,「불교계」,「조선불교총보」등 대중불교 잡지를 발간하여 불교를 포교하고, 불교진흥회의 설립 목적인 민족문화 수호 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사 정리에 뜻을 품고 한국 불교에 대한 모든 자료를 모아 1918년 그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서 빛나는 명저로 평가받는 「조선불교통사」를 자비로 출판했으며, 1923-1924년에 걸쳐 「조선불교사」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 그는 일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새로운 문화정책 을 발표하고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의 한 사람으로 그를 위촉했는 데 그는 이를 수락했다. 그의 수락 결정은 오직 학문연구 특히 국사연구에 대한 집념 때문이었지 일제에 동조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양심적 가책은 그를 늘 괴롭혔다. 그때마다 그는 이 오명을 씻는 일은 애초 뜻한대로 올바르고 빈틈없는 한국사를 정리하는 것이라고 채찍질하고 하나하나 세심한 신경과 정성 을 쏟았다. 위원직을 맡은 이듬해 이런일이 있었다. 제1회 위원회가 열린 자리였다. 일본인 이나바 위원이, 신라 통일시대의 조선 은 지금의 조선과는 그 지역이 다르고 현대의 조선에서 본다면 발해는 한 지방 에 국한되었던 명칭이라고 발언했다. 이것을 듣고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째서 발해가 한 지방이란 말인가, 한국사 체계에 발해사가 고구려사와 함께 들어가야 한다." 하고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건국신화는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역사에 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민족적 주체의식 이 뚜렷이 나타난 예라 하겠다. 그가 '조선사 편찬위원회'위원으로 15년간 일하면서 조선사 편찬에만 종사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를 비롯한 민족문화 각 분야에 걸쳐 수집한 자료를 정리, 연구하였으니 곧 전통문화연구 저서로 「조선신교원류고」,「조선상제예속사」, 「조선유교지양명학」,「이조시대경성시제」등이 있고, 1927년엔 「조선여속고」 「조선해어화사」,「조선무속고」등이 있는데, 「조선해어화사」는 우리 사회 에서 천민층으로 버림받아 온 기생을 주제로 해서 애정, 시조, 시가 등 그들의 생활상과 주변자료를 모두 모아 집대성한 것이며, 「조선여속고」는 혼인, 가족, 복장, 교육, 민중행사 등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으로써, 당시 남존여비의 불합리 한 점들을 시정하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여성에 관한 지식을 더 밝히기 위한, 우리나라 여성사의 개척적인 명저이다. 그리고 1928년 「조선기독교급외교사」를 출간했는데 이것은 능통한 불어를 통해 달레(Dallet)가 쓴 「조선교회사」를 완전히 이해하고 조선시대 책들을 주로 더듬어 기독교사의 체계를 이룩하여 놓은, 역시 이 분야연구의 선구적인 저서이다. 뿐만 아니라 춘향전을 한시로 풀이한 「춘몽록」,「조선유학급유학사상사」, 「조선신화고」,「조선십란록」,「조선의약발달사」,「조선사회사」, 「조선도교사」등도 있으나 「조선도교사」만 남고 모두 6.25때 없어져 버렸다 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는 일본 총독부의 문화정책에 참여한 양심의 거리낌을 떨쳐 버리지 못해 늘 괴로워했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신의 호를 무무(無無) 또는 무능거사(無能居士)라 지었으니 이는 속이 비어 아무것도 없는, 또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나무라고 비웃는 것이었다. 또 늘그막에는 입버릇 처럼 "총독부 시궁창에 발을 담갔으니 내가 학문을 한들 무엇에 쓰리오." 하며 자책했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조선 총독부 보물고적보존회의 위원으로 있으면서 민족 문화 수호에 관심을 보였으며, 1931년엔 박승빈, 오세창 등과 함께 계명구락부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계몽하고 드높이는 데 앞장섰고,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 전문학교에서 조선 종교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이 끝날 무렵인 1938년 이후엔 조선 왕조의 직에 나가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이응주가 아버지 이능화에 대해 쓴 글을 보면 그의 사람 됨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다. "선친께서는 우리들에게 엄하심과 너그러우심을 함께 하시고 학문에 열을 다하신 어른이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한국문화의 연구에 전념하시고 저술을 출간하였다. 책을 보려고 먼 길을 멀다 않고 가서는 신문지, 창호지 를 가리지 않고 쓸 수만 있는 것이면 거기에 초서로 기록하시고‥‥‥." 70노령에 들어서자 그는 시골 괴산읍 서부리로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한가히 지내다가 자녀들의 권유로 다시 서울 돈암동 자택으로 돌아온 지 5년 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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