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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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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1861∼1922)
내용 "인물

손병희는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사업가로 1861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청주 관아의 서리인 손의조와 경주최씨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의기있는 남아로 품성이 호탕하고 불의에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약하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려는 의협심도 남달리 뛰어났다.
12세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관청에 공금을 내러 가는 길에 눈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관청에 내야 할 공금을 몽땅 털어 그 사람의 구휼비로 쓰는가 하면,
옥에 갇힌 친구 아버지의 석방을 위하여 친구에게 자기 집의 돈 있는 곳을 알려줘 그 돈으로 친구아버지를 풀려나게 한 적도 있었다.
1882년 22세 때 동학에 입교한 후 최시형의 수제자로 익산 사자암과 공주의 가엽사에서 수도하고
1893년 보은사에서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을 주도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석권하고 북상하다가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고 말았다.
그 후 최시형 교주와 함께 원산, 강경 등지를 전전하면서도 동학의 교세 확장에 힘썼다.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동학에 쏟는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열성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교주로부터 의암(義菴)이라는 호를 받았으며 교주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 그 뒤를 이어 교주가 되었다.
   

그는 일제의 강압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해외망명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다.    

1901년 상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으로 개명하고 중국의 손문(孫文)과 국제정세를 논하는 등 국제적 활동에 전력하기도 하였다. 망명생활 중 본국과 연락하면서 교세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교도로 하여금 새로운 문명확술을 익히게 하고자 일본유학을 알선 하였다.    

이 때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해로서 일본의 위세는 높아만 갔고 한반도 침략야욕이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1904년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일본에서 진보회(進步會)를 결정하고 이용구를 국내로 파견, 국내 조직을 강화하여 회원 16만명을 확보하고 신생활 운동을 실천하도록 하는 한편 애국심 고취에도 전력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이용구는 손병희를 배신하고 친일단체인 유신회와 합하여 일진회를 조직하고 더 나아가 을사조약에 찬성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그는 이용구의 매국행위를 개탄하면서 즉시 귀국하여 이용구를 비롯한 친일분자들을 축출하고 더 이상의 불행을 막기 위하여 정교분리를 천명하고 교명에 대한 사후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심사숙고 끝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동학의 참신한 정신을 되살리며 본래의 종교운동을 주창하였다. 이를 위하여 동학의 근본인 인내천사상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이와같이 혼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탁한 때문이다."라고 하며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안정시켜야 된다고 연설하였다. 이어서 "우리 도는 후천개벽의 도라 후천개벽은 인심개벽에서 시작하는 것이요, 인심개벽은 곧 정신개벽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이 정신 개벽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천도 그것을 잘 행하는데 있는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 이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천도교로 몰려 그 수는 날로 늘어만 갔다. 이에 힘입은 그는 출판사 보성사를 설립하고 천도교 월보를 발간하여 천도교 교세 확장에 전력하였다.   

 한편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깨닫고 1909년 보성전문학교와 중학교 , 소학교 그리고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육의 남녀평등을 주장하였다.    

1918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한 국제정세의 전망을 포착한 그는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그 주요내용은 독립운동을 대중화하고 일원화 하여야하며 방법은 비폭력이어야 한다는 중대한 합의를 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천매를 인쇄하였다. 이튿날 손병희는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33명을 소집, 거사를 재확인하고 이번의 의거는 민족적 지상과업임을 전제한 뒤 총의에 의지하여 성취될 것을 굳게 믿는다고 격려 고무하였다. 또한 독립선언식을 파고다공원에서 할 경우 많은 불상사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는 등 33명 민족대표의 필두로서 3·1운동 당일의 계획을 완료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는 긴장과 신념과 열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예약한 방에 모였다. 이때 독립통고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에 의해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는데 이때 파고다 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만세장소 변경에 당황하고 항의하는 소동도 있었다. 오후 3시 손병희의 제의로 한용운이 독립운동의 결의를 다짐하는 간략한 인사에 이어 그의 선창으로 만세 3창을 불렀으며 독립선언문 낭독으로 식은 15분 만에 끝났다. 경찰이 오자 의연하게 붙들려 갔다. 파고다 공원에 묘여 있던 수천 명의 학생들은 때를 맞춰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남녀학생들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전국에서 상경하여 대기하던 시민과 민중이 가담하자 독립의 의지와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으며 즉시 전국적으로 확대 파급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1년여나 계속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해외 각지에서도 이 소식에 자극을 받아 3월 10일 이후 만주, 미주, 중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내 3·1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이 3·1운동은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달성하고자 민족 전체가 봉기한 세계사적 대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 3·1독립운동은 남녀, 빈부, 귀천, 지연, 학벌, 문벌 등을 초월한 전 민족의 자주독립을 절규한 민중운동이었다.    

일본경찰에 검거된 그는 1920년 10월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상춘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하였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우이동에 있으며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1년 충청북도 문화재 보존회에서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태어난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 유허비를 건립하였으며 그의 생가는 1979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복원 건립하였다. 또한 1980년에는 그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주 우암산 기슭에 3.·1공원을 만들어 그곳에 그의 동상을 세우고 오가는 청주 시민의 마음속에 그의 애국충정을 되새기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