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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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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헌(1810∼1884)
내용   인물 이미지 없음

1876년(고종 13)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1882년(고종 19)엔 미국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한 조선 후기의 무신이며 외교가인 신헌은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출신이다.
1810년 3월 25일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신홍주)는 조선 말기 어영대장, 훈련대장, 병조판서를 역임 했고, 아버지(신의직)는 부사를 지낸 전형적인 무관의 가문이다.
어려서 할아버지의 엄한 교육으로 경서를 공부했고 당대의 이름난 실학자인 정약용, 김정희 아래서 실사구시적인 학문을 닦았으니 이때부터 개화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828년 18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주부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순조, 헌종, 철종, 고종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는데, 헌종 때에는 왕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 전라도 수군절도사, 봉산군수,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 대장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그해 7월 헌종왕이 갑자기 병환을 얻어 위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급한 나머지 그는 궁내의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의원을 데리고 궁궐로 들어가 왕을 진찰케 했다.
그러나 헌종의 병은 호전되지 못하고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왕을 진찰했다는 바로 그 죄목으로 탄핵을 받고 전라도 녹도로 귀양을 가 위리안치된다.
여기서 4년여 만인 1853년에 감형되어 무주로 옮겨졌다가 철종의 특별 배려로 귀양살이 8년만인 1857년에 풀려나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이어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그는 1864년에 형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병조, 공조판서를 역임하던 중 1866년 '병인양요'를 맺는다. 병인양요의 내력은 대략 이러하다.
대원군은 처음엔 천주교를 탄압하지 않았으나, 1866년 국내에서 몰래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 보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탄압하기 시작하여,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를 비롯한 신자 8,000여명을 죽였다.
이때 탈출한 선교사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이 9월에 전함 3척을 이끌고 조선을 공략하기 위해 쳐들어왔으나 여의치 않자 물러났다가 다시 10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물치도를 거쳐 갑곶에 상륙,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했다.
그러나 문수산성을 지키고 있던 한성근과 정족산성을 지키고 있던 양현수에 의해 쫓겨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고집하게 되었고 천주교 탄압도 더 강하게 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해가 병인년이라 하여 '병인양요'라 하거니와, 이때 신헌은 총융사(군영을 받은 관직)로 강화의 염창(소금 창고)을 수비했는데, 이 난이 끝난 다음엔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신무기 제조에 힘써 수뢰포를 제작, 그 공으로 숭록대부에 올랐으며, 또한 '학인조비선'도 만들었다.
이것은 학의 깃을 뽑아 이를 짜서 선함(배)의 주위에 붙인 이른바 수상용 비행선인데 한강 언덕에서 실험했으나 별 효과가 없어 제작을 중지했다.
그리고 목탄증기를 써서 가게하는 철갑선도 제작하여 실험 했으나 속도가 너무 느려서 이것 역시 제작을 중지했다.
하지만 무장으로서의 그의 노력과 역사적 의의는 크게 평가받고 있다.
그 뒤 어영대장, 지행삼군부사,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74년엔 진무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광성, 덕진, 초지 3진에 포대를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1875년(고종 12)에 운양호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이 1875년 8월 2일에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 부근에 운양호를 정박시키고 식수를 구한다는 이유로 수십명의 수병이 연안을 탐색하면서 초지진의 우리 포대가 있는 곳까지 다가왔기 때문에 우리 수병이 그들에게 포격을 가했다.
이에 운양호는 이를 트집잡아 맹공격을 하여 초지진을 파괴한 다음 상륙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나 구식 화승총에다 사정거리도 70m밖에 안되는 대완구포 가지고는 명중률이 정확한 최신 함재포(군함포)를 갖고 잇는 운양호를 당해낼 도리가 없어 전사자 35명, 포로 16명, 대포 36문, 화승총 130여점에 무수한 군기, 총탄 등을 빼앗기고 패하고 말았다.
일본측은 겨우 2명의 경상자를 냈을 뿐이다.
이것이 운양호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은 기세가 등등하여 표면상으로는 이 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이 기회에 서로 통상하는 조약을 맺자고 하면서 1876년(고종 13)에 구로다를 전권대사로 파견하여 강압적으로 나왔다.
이에 신헌은 고자세로 오만불손하게 나오는 구로다에 맞서 그 불법성을 지적하는 등 위엄을 보여 구로다로 하여금 말문이 막히게 하였으니 이로써 3차례의 회의가 깨질 뻔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이홍장의 권고와 평소 신헌을 도와 문호개방을 주장해 온 박규수, 오경석이 세계의 대세가 개국의 흐름으로 가고 있음을 주장 하여 결국 체결을 단행했다. 신헌은 이때의 협상전말을 '심행일기'라는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 뒤 1878년에는 병으로 총융사를 사직하고 노량진에 있는 온휴정에서 요양 하며 쉬고 있는데, 1882년(고종 19)에 고종이 다시 불러 경리통리기무아문사가 되어 역시 전권대사로 미국의 슈벨트(R. W. Shufeldt)와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우리 나라가 서양의 나라와 국교를 맺은 최초의 일로 그 뒤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의 나라와도 국교를 맺는 발판이 되었다.
신헌은 무장이면서도 유학에 정통하여 '유장'이라 불려지기도 했으며, 개화파 인물들인 강위, 박규수 등과 폭넓은 교유를 하여 현실에 밝았다.
또한 정약용의 민간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을 이어받아 이를 발전시켜 「민보집설」「융서촬요」 등과 같은 병서를 저술하여 자신의 국방론을 집대성하였다.
한편 김정희에서 서예를 배워 이에 조예가 깊었으며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에 조력하였을 뿐 아니라 「유산피기」라는 역사 지리서를 직접 편찬하기까지 했다. 이밖에 농법에도 관심이 있어 「농축회통」 이라는 농서를 펴내기도 했으며 1843년(헌종 9) 그가 전라도 우수사로 있을 적 에는 대둔산의 초의선사와 사귀면서 불교에도 관심을 두었다 한다.
그는 말년을 고향땅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로 돌아와 지내다가 1884년 12월에 74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묘소는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유절산에 있다.
평산신씨 시조 묘소가 있는 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