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영역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하단링크 바로가기

꿈나무키우는 충북!

어린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충청북도 도청

자랑스런 충북인

자랑스런 충북인 상세보기 - 제목, 내용 제공
최명길(1586∼1647)
내용   인물 이미지 없음  

최명길! 그는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기 개인의 치욕을 참았던 사람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조 인조 때 청나라가 쳐들어와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수치스럽더라도 항복을 하여 실리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항복문서를 작성해서 바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평화주의의 선구자로 지금까지 그 이름이 빛나고 있다.

그는 1586년(선조 19)에 금천에서 태어났다. 비록 충북에서 출생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묘소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어 충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영총부사를 지낸 사람으로, 그가 아직 7세였을 때, 열심히 책을 읽으며 가르치기를

"나라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성인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고 하여, 이를 가슴에 새겨 주었다. 8세 때에는 부모 앞에서

"오늘은 증자가 되고 내일은 안자가 되며, 또 그 다음 날엔 공자가 되리라."

하여 부모를 놀라게 했다는 말도 전한다.

그는 당시 대학자인 이항복과 신흠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후에 크게 이름을 낸 이시백, 장유 등도 같은 문하생이었다. 그는 스승인 신흠의 사랑을 특히 많이 받았다. 그가 1605년(선조38) 20세로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 해 증광문과에 급제했을 때 신흠은 승정원의 높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보아 아시는 바와 같이 최명길은 몸이 약하긴 해도 정신만은 누구보다도 맑고 깨끗합니다. 장래에 틀림없이 큰일을 하고 또 존경을 받게 될 사람입니다."

라고 칭찬을 하면서 특별히 추천까지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승무원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었는데, 이때 반대파인 북인의 이산해, 유영경, 정충민 등이 정권을 잡는 바람에 기를 펴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조가 서인인 김제남의 둘째딸(인목대비)을 둘째 왕비로 맞고 영창대군까지 낳으니 다시 득세하여 공조, 병조좌랑을 지내고, 선조가 죽은 후 1614년(광해군 4)에 27세로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런데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 폐모사건이 일어났다.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 자기의 외손자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한다고 반대파에서 거짓으로 꾸며서 광해군이 김제남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으로 쫓아버리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보낸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폐모(비)계획의 기밀을 최명길이 누설하였다고 탄핵당하여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 가평으로 들어가서 이시백, 장유, 조익 등과 어울리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다가 1623년(광해군 15)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폐모사건 등 북인 및 광해군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인세력인 이귀, 김자점, 김유, 이괄 등이 이들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세워 인조를 옹위한 정변이다. 여기에 최명길도 가담하여 인조가 등극하자 정사공신 1등공신에 올라 완성군에 봉해지고 이조참판과 비변사제조를 겸했다.

그런데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에서 자기보다 공이 낮은 최명길은 1등공신에 오르고 자기는 2등공신이 된 데 대한 불만에서였다. 이 때 최명길은 총독부사라는 직위로 직접 싸움에 나아가 이괄의 군대를 무찔러 평정함으로써 1등공신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로써 나라 안이 안정되자 그는 백성들의 호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군역의 의무를 평등하게 하자는 호패법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을 뿐 아니라 호패청 당상관에 올라 이를 직접 관장하였다.

그리고 3년 후,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을 맞는다. 광해군 때는 후금(후의 청나라)을 배척하지 않다가 인조가 왕이 되면서 후금을 멀리하고 명나라를 가까이 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후금의 태종이 명나라를 치기전에 조선을 먼저 정복하고자 하여 일어난 싸움이다. 이 때 인조와 대신들이 후금의 강력한 병력에 쫓겨 강화로 피신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대신들 간에는 화친이냐 싸움이냐의 의견이 맞서게 되었는데, 대세로 보아 화친이 불가피함을 깨달은 그는 싸우자는 쪽의 극렬한 반대에도 무릅쓰고 왕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마침내 형제의 동맹을 맺었다. 이것은 오직 국가의 장래와 평화를 사랑하는 충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많은 지탄을 받았다.

그 후 그는 경기관찰사, 우참찬, 부제학, 예조판서 등을 거쳐 이조판서에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을 자신들에게 열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조선은 화해를 깨고 후금을 배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화해를 지킬 것을 내세웠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그의 염려대로 1636년(인조 14) 후금의 태종은 국명을 '청'이라 고치고, 이제는 형제관계가 아니라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하며 쳐들어왔다. 이것이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중과부적임을 느낀 조정에서는 인조의 두 아들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왕족들을 강화로 보내고 인조 및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45여 일을 포위당해 있으니 식량은 떨어져 가고 병력은 지쳤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신들 간에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가 나섰다. 아무 대책없이 명분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나라의 장래와 백성을 위해서는 항복할 수 밖에 없음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항복문을 작성했다. 이른 본, 끝까지 싸움을 주장하는 김상헌이 그에게 달려들어 항복문을 빼앗고 찢어버리며 통곡했다. 이것을 보고 그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찢어진 항복문을 주우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 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된다."

하며 침통해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만한 일이다.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해 겨울에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고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는 동안 청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세폐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위한 징병요구를 막았다.

그런데 1642년(인조 20)에 변고가 일어났다. 그것은 청나라에 항복한 홍승주라는 명나라 사람에 의해서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청나라에 들어가 임금과 다른 신하들은 모르는 일이며 자신과 임경업이 사사로이 명나라에 사람을 보낸 일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거기서 병자호란 때 항복을 반대하여 먼저 잡혀온 김상헌과 만났다. 같이 옥살이를 타국에서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다를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했다. 이때 주고받은 시가 전한다.

조용히 찾아보니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반가웁고나.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노라.

이에 최명길이 받았다.

그대 마음은 돌같이 끝내 풀릴 줄 모르건만,
내 마음은 문고리같아 둥글게 돌아갈 줄만 아노라.

마침내 그들은 1645년(인조 23) 3월에 풀려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이제 늙고 약해진 몸으로 쉬려했으나 인조가 또부원군 겸 어영제조로 임명했는데 그 2년후 병으로 눕게 되었다. 임금이 직접 문병을 갔으나 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1647년(인조 25) 5월 17일, 62세였다.

저서로 그의 호를 딴 「지천집」19권과 「지천주차」가 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