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현(1511∼159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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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롭던 우리나라를 왜구들이 짓밟았던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서 동래성을 최후의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순국한 충의의 불사신이 있다. 그가 바로 충렬공 송상현(1551-1592)이다. 그는 여산 송씨이며 청주시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천곡(泉谷)이며 자는 덕구(德求)이다. 송상현은 성품이 곧고 강직하였으며 10세 때 경서에 통하였고, 그는 1576년(선조9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며, 1584년(선조 17년)에는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그는 귀국 후 호조, 예조, 공조의 정랑을 거쳐 재물관리의 책임자인 군자감을 맡아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해나갔다. 그 후, 1591년(선조 24년) 통정대부에 승진되어 동래부사로 부임한 그는 잦은 왜구들의 노략질을 소탕하기 위하여 먼저 성곽을 수리하면서 성 외곽에는 커다란 나무들을 빽빽하게 심어 방패 역할을 하는 동시에 안으로는 철저하게 군사교육을 시켜갔다. 송상현의 예감은 맞아들어 갔다. 1952년(선조 25년)에 왜군은 지금의 중국인 명나라를 치겠으니 조선은 길 좀 빌려 달라는 애청이었다. 그러면서 갖은 아첨을 떨었으나, 우리나라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 지방에 상륙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7년간의 지긋지긋했던 임진왜란인 것이다. 당시 부산 첨사 정발은 결사적으로 분전하여 부산 지방을 지켰으나 힘의 열세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고 부산지방을 빼앗기고 말았다. 왜군은 사기가 하늘까지 닿아 그 해 5월 25일 급기야 부산성을 탈환하고 동래성에 이르렀다. 동래부사인 송상현은 성문을 굳게 닫힌 후, 죽음을 각오하고 왜군과 대처하고 있을 때 적장은 송상현에게 이르기를 "우리와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 라고 위협해 왔다. 이에 부사 송상현은 "네 놈들과 싸우다 죽더라도 길은 절대로 빌려 줄 수 없다" 라고 응수하면서 벽력같이 소리쳤다. 그리하여 왜군과의 피나는 전쟁은 시작되었다. 송상현은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겹겹이 둘러싸고 쳐들어오는 적진 속에서 왜적을 마구 활로 쏘아 죽여버렸다. 그 때 경상좌병사 이각이 부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시 동래성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왜군의 엄청난 군사력에 미리 겁을 먹고는 소사역 쪽으로 도망을 가 버렸다. 천곡 송상현은 남문루에서 올라가서 적군을 무리치려 했으나 워낙 엄청난 숫자의 적군과 맞대결을 했기 때문에 이튿날 동래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송상현은 부끄러워 갑옷 위에 조복을 입은 채 선조 임금이 계신 쪽을 향하여 네 번이나 큰절을 하며 사죄하였다. 한 왜병이 송상현의 목을 시퍼런 칼로 내리쳤다. 그때 적장인 다이라는 송상현을 살해한 왜병을 끌어 내어 꾸짖으면서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적장은 이르기를 "아무리 적장이지만, 그의 높은 충적과 기개는 가히 본받을 만하다. 감히 그의 목을 치다니..." 라고 분개하면서 적장인 다이라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부사 송상현은 동래성이 함락되기 전, 우리나라가 불리하여 일본에게 도저히 승리하지 못할 것을 예견하면서 즉흥적으로 시 한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외로운 동래성이 적의 침해를 당하여, 국가의 환난을 수호하지 못한 채 죽는 것은 군신의 대의를 중하게 여기고, 부자의 은혜를 가벼이 하는 것이라." 라고 비련하고 한이 맺힌 뜻을 담고 있었다. 이를 자신의 아버지께 전하였는데 여기에서 그의 충성심과 효성심을 엿 볼 수 있다. 일찍이 적장인 다이라는 우리나라에 사신을 수차례 오갈 때마다 송상현 부사의 높은 인격을 존중한 나머지 그가 변을 당할까 봐 빨리 피신을 하라고 간청을 하였으나, 송상현은 끝내 충의를 지켰다. 적장인 다이라는 송상현의 충절에 탄복하여 그의 시체를 동문 밖에서 장사를 지내고, 적장이 직접 지은 시를 낭독하면서 제사까지 지내준 후, 나무를 깎아 비를 세워 주는 등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최고의 예우를 해주었다. 이 때 천곡 송상현은 42세로 그의 나라를 위한 충성심과 장렬한 순절의 비통한 소식은 온나라 안으로 삽시간에 번져 나라를 구성하겠다는 위국충절의 기풍을 불러일으켜 의병 봉기의 시발점이 되어 전국 각 처에서 의병들이 나타나 위급한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보물 393호인 '동래부사 순절도'는 송상현이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당시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그 때의 처참한 상황과 격전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의 마음을 숙연케 해준다. 송상현은 1594년(선조 27년) 왕의 명으로 지금의 내무부 장관격인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열(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1595년에 그의 고향인 청주시 강서에 이장을 하였고 충렬사와 정려문을 건립하여 나라를 위해 장렬히 목숨을 바친 그의 넋을 오래도록 기리고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발 장군이 순국한 부산성 싸움(1592. 4. 14)에서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노량해전(1598. 11. 19)에 이르기 까지 7년간에 걸친 악몽의 임진왜란이 지속되는 동안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순국한 선열은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조국을 위해 결사수호한 송상현 장군의 호국정신은 드높은 민족의 기상을 보여주었고 이로 인하여 국토를 수호하고, 국난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의병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봉기하면서 어려운 국운을 지켰다는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국제적 개방화의 물결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 때, 바람앞의 등잔불처럼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나라를 위해 애국 충정한 충렬공의 불사신 정신을 되새겨 봄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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