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14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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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은 고려 말부터 조선초기의 사람으로 충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문길의 아들로 문신이며 본관은 음성이다. 박순은 고려말 1388년(우왕 14년) 요동정벌 때에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에 있었다. 박순은 성품이 곧고 의리가 깊었고 이성계와는 개인적으로도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당시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는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개성을 떠나 신의주를 거쳐 위화도에 도착했으나 어둠이 짙어 그날 밤을 그곳에서 쉬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바람 앞의 등잔불 같은 매우 위태롭고도 불안한 시기였다. 또한 위화도에서 머물고 있는 대부분의 군사들도 조국 땅에 부모님의 친자식을 남겨둔 채 중국 명나라와의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했다. 이성계는 그날 밤 위화도에서 많은 생각을 하다가 잠깐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세 개의 커다란 통나무가 간격을 맞춰 자신을 내리누르는 꿈을 꾸었다. 이성계는 통나무에 짓눌려 숨을 제대로 쉴수가 없었으므로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튿날 새벽, 이성계는 너무나 꿈이 이상하여 그 곳의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갔다. 그때, 점장이는 이성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뒤, 고개와 혀를 내두르면서 참으로 신기하다며 두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는 "당신은 머지않아 나라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라고 자신있게 이성계에게 말했다. 이성계는 복채를 주려고 하였으나 점쟁이는 이 다음에 왕이 되거든 잊지나 말라면서 극구 사양했다. 이성계는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면서 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가장 친한친구 박순과 자주 상의했다. 박순은 이성계의 명을 받고 우리 군대가 위화도에서 다시 고려로 돌아가야만 할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한 후 병사들 전원을 고려로 다시 되돌아오도록 작전을 폈다. 결국 1392년,500여년의 맥을 면면히 지켜온 고려는 망하고 이 땅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면서 이성계가 태조가 되었고 박순은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그 후 1398년(태조 7년) 왕자의 난의 일어날 무렵이었다. 태조는 정치에 뜻이 없어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준 후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태조는 여러 왕자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을 미워하여 함경도 함흥에 칩거하였다. 태종은 태조에게 수차례에 걸쳐 특사를 파견하여 태조의 귀환을 요청했으나 태조는 서울에서 오는 특사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렸으므로 서울로 단 하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태종의 특사로 가는 사람마다 죽어 돌아오지 못하니 '함흥차사'라는 말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태종이 여러 신하에게 큰 소리로 묻기를 "누가 함흥에 갈 수 있느냐"라고 하니 이에 응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한동안 침묵만이 흐르다가 갑자기 판중추부사원 박순이 자칭하여 그 곳에 가겠다고 태종 임금에게 아뢰었다. 박순은 하인도 없이 스스로 새끼달린 어미말을 타고 홀로 함흥에 들어갔다. 태조가 있는 곳에 이르러 일부러 새끼말을 나무에 매어 놓고 어미말을 타고 나아가니 어미말이 머뭇거리면서 뒤를 돌아 새끼말을 보며 서로 슬피 울며 앞으로 가려 하지를 않았다. 태조가 이 광경을 보고 박순에게 사연을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새끼말이 길 가는데 방해가 되어 매어 놓았더니 어미말과 새끼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여 저렇게 서로 슬피 울고 있습니다. 비록 하찮은 동물이라도 혈육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라고 풍자하면서 비유하니 태조는 몹시 슬퍼하였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는 옛 친구인 박순을 친절하게 대하고 함흥에 머물러 있도록 권하면서 서울로 보내지 않았다. 하루는 함흥에서 태조가 박순과 함께 장기를 두고 있을 때 마침 쥐가 그 새끼를 켜안고 처마 끝에서 떨어져 사경을 이르렀는데도 끝내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 박순은 장기판을 제쳐놓고 어미쥐와 새끼쥐의 사랑스러움을 말하면서 태조에게 서울로 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때 어미쥐와 아기쥐가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성계는 박순이 서울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고 말았다. 박순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고, 태조에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바로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따라와 태조를 모시고 있던 신하들은 당장에 박순을 죽여 버리겠다고 태조에게 간청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박순이 용흥강에 갈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박순이 그 곳을 떠나 멀리 용흥강을 건너갔을 것이라 생각한 태조는 그때서야 "정 그를 죽이려면 죽여라"라고 명령을 하여 신하에게 큰 칼을 뽑아주면서 "박순이 만약에 용흥강을 건넜다면 쫓아가지 말고 그대로 돌아오너라."라는 명을 또렷하게 덧붙였다. 그 때 박순은 서울로 오던 중 병이 나서 중간에서 머물다가 다시 출발하여 용흥강에 가가스로 도착했다. 그리고 배에 올라 강을 건너려고 할 때였다. 박순은 그를 쫓던 태조의 신하에게 붙잡혀 허리를 잘렸다. 박순의 허리에서는 시뻘건 피가 주룩주룩 흘러나왔고, 박순은 그만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태조는 이소식을 듣는 순간, 너무나 당혹하고 놀라 비통하게 여기면서 "박순은 내게 둘도 없는 좋은 친구였는데....., 하지만, 내가 전날 친구에게 한 말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라고 하면서 태조는 박순과 이야기한 것처럼 서울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 그 후, 태종 임금은 박순의 죽음 소식을 전하고 즉시 그의 공을 높이 받들어 판중추부사에 명하고 이어서 의정부 조찬성에 추증했으나, 그의 자손을 관리로 임명하고 녹전을 하사하였으며 그의 생전의 모습을 기려서 공적을 길이 보존하였다. 박순의 처인 장흥 임씨는 고려조에 대사헌을 지낸 집안의 여식인데 박순이 함흥으로 태조를 찾아갔을 때, 매일 부군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기도해 왔다. 그러나 그의 처는 1402년(태종 2년)에 부근의 부음을 듣자 남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면서 온몸을 깨끗이 씻고 남편이 잠들고 있는 쪽을 향하여 네 번이나 큰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자결한 후 사랑했던 남편곁으로 따라갔다. 고향인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박순의 충신문과 부인 임씨의 열녀문을 세워 박순 내외의 충과 효의 정신을 본받게 하였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함흥 용강사에 박순의 위패를 모셔 날마다 불공을 드렸으며 조선시대 숙종 때에는 충민이란 시호를 하사했다. 또한 지금도 박순의 충정어린 공이 담뿍 담긴 충신문과 그 부인의 열녀정신을 기리기 위해 열녀문이 있는 음성군 대소면 오리골을 찾는 이들이 해가 갈수록 더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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