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1486∼15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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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훌륭한 이는 3세에 천자문을 떼었다느니, 하늘이 낸 천재라느니, 신동이라느니 하는 말을 듣는다. 부럽다기보다는 신기한 일로 여겨져 호기심이 동한다. 그런데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에서 1486년(성종 17)에 태어난 김정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글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하도 신기하고 기특해서 할머니인 황씨가 3세부터 글을 가르치니 7세 때는 할머니의 병을 간호하는 의젓함을 보이기도 하고, 10세 전에 사서(四書)에 능통했으며 14세에 별시의 초시에 응시해서는 당당히 장원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 어리므로 더 이상의 과거는 보지 않고 꾸준히 성현의 글과 가르침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선대로부터 대대로 살아온 고향 보은에서 소년 시절을 이렇게 보내고 있던 15세 때 부친상을 당한다. 처음 당해 보는 충격이건만 어른스러운 침착함으로 예법에 따라 상을 치르고 모친을 극진히 봉양했다. 18세에 혼인을 했는데 회덕 계족산의 법천사라는 절에서 공부하던 중 거기에 머물고있던 송여해라는 어른의 눈에 들어 그의 조카딸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가 고향과 모친 곁을 떠난 것은 별시 갑과에 장원급제한 1507년(중종 2)봄이다. 그의 나이 22세로서 이때부터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한다.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지제교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친 후 문신(文臣)들을 시험하는 '정시'에 장원하고 병조정랑, 홍문관 부교리, 교리, 사간원 헌납 등을 지냈다. 비교적 순탄한 벼슬길이었다. 1501년에는 충청도 도사로 고향으로 와 근무하면서 그리던 어머님을 봉양하며 청풍 한벽루와 속리산 등 자연경관을 두루 유람한다. 1512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교리, 이조정랑을 거치지만 학문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 이듬해에 독서당에 들어갔고 얼마 후엔 벼슬까지 내놓고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여기까진 이렇듯 그의 길은 아직 잔잔한 물결이었다. 그러나 1514년(중종 9) 혁신적인 새 정치를 펴려는 사람들의 천거로 다시 그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순창군수로 부임한다. 이제부터 그의 앞에 파란과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다. 첫 파란은, 이듬해인 1515년(중종 10)에 중종의 비인 장경왕후가 원자 호(뒤의 인종)을 낳고 승하하자 새로 앉힐 왕비문제로 일어났다. 일부 대신들은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숙의 박씨를 천거했다. 그러나 김정은 담양부사로 있던 박상과 함께 이를 반대했다. 숙의 박씨는 이때 복성군 미를 낳았기 때문에 숙의 박씨가 왕비가 되면 원자인 호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종 반정으로 왕후자리에서 쫓겨난 신씨를 다시 맞아들이자고 했다. 중종 반정은 1506년(연산군 12)에 성희안, 박원종 등이 폭군인 연산군을 쫓아내고 성종의 둘째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중종이 되게 한 사건으로, 진성대군이 왕이 되자 부인이었던 신씨도 따라서 왕후가 되었다. 그런데 중종 반정을 일으킬 때 신씨의 아버지인 좌의정으로 있던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성희안 등에게 살해되어 역적으로 몰렸다. 이걸 가지고 중종 반정의 공신인 박원종이 역적의 딸인 왕후 신씨는 마땅히 쫓아내야 한다고 극구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폐비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를 이은 비가 장경왕후다. 이러하므로 신씨의 폐비는 부당했으며, 또한 신씨에게는 소생이 없으니 복위시키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상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씨 폐비를 적극 주장했던 박원종 등을 처벌해야 한다고 아울러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 일로 하여 김정과 박상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김정은 고향땅인 보은의 함림역(지금의 보은읍 학림리)으로 유배되었다. 이 때 반정 공신인 권민수와 이행 등은 김정의 주장은 그릇된 것이라고 엄중히 죄로 다스릴 것을 주장했고, 영의정 유순은 죄 주기를 반대하는 등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신 사이에도 대립으로 옥신각신했으며 양 쪽이 다 옳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었다. 이런 가운데 사간원의 정언으로 있던 조광조가 권민수와 이행이 과격하게 김정의 주장을 막아 이러한 부당한 일이 벌어졌다고 논박하여 이들 둘이 파직되고 김정은 비로소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벼슬을 극구 사양하고 시끄러운 조정을 떠나 금강산과 당시 청주 소속이었던 주안(지금의 대덕구 일대) 등지로 유람을 하거나 머물면서 후진 교육에 힘쓰고 유명 인사들을 찾아가 학문을 갈고 다듬었다. 이러한 사이 조정의 시끄러움이 가라앉자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정치개혁을 하려는 조광조가 뜻을 같이 하자고 권고를 하는데다 왕의 특명도 있고 해서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서 사예, 부제학,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러면서 조광조와 함께 뜻한 바 대로 도의를 숭상하고 인심을 바로잡으며 성현을 본받는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 그 바탕이 되는 성리학을 철저히 강론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데 주체 노릇을 할 신진사류를 발굴하기 위한 현량과를 특별히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했으며 향촌 구석구석까지 향약을 세워 의리의 정신을 파급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왕도정치의 이상을 향해 혁신적인 개혁을 해 나가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반정 공신들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이것이 바야흐로 김정의 일생일대의 결정적인 파란과 시련의 싹이 될 줄이야! 특히 조광조가 중종 반정 과정에서 공을 세운 반정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5명의 공훈이 별 근거가 없고 그 수가 많다하여 명단에서 삭제하려고 하자 공신들은 목숨을 건 거센 반발을 하였고 마침내는 남곤, 심정, 홍경조 등의 모략과 중상에 의하여 1519년(중종 14) 조광조, 김정, 기준 등이 옥에 갇혔다. 이 사건이 이른바 '기묘사화'이다 당시 형조판서였던 김정은 죽음을 면키 어려웠으나 병조판서 이장곤과 영의정 정광필이 젊은 선비들의 실수이니 김정만은 살리자고 눈물을 흘리며 말리고 성균관 유생들의 호소에 의해 죽음은 면하고 금산으로 귀양을 갔다가 진도로 옮겨지고 다시 또 제주도로 위리안치(가시울타리 속에 귀양살이 시키는 것)되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이듬해 음력 10월 30일에 사약을 받는다. 그이 나이 36세다. 사약을 받고 붓을 들어 쓴 그의 시 한수가 전한다. 「절도(외진 섬, 제주도)에 와서 외로운 혼이 되는구나. 그 후 1545년(인종 원년)에 관작을 다시 받았고, 선조때인 1568년에는 퇴계 이황이 건의하여 남곤의 관직과 지위는 추탈하고 김정에게는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퇴계 이황은 충암 김정을 평하기를 "학문은 어느 뛰어난 사람보다도 높았고 깊은 식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또 「해동명신록」에 김정의 인품을 일목요연하게 평해 놓은 것이 있다. "타고난 성품이 고상하여, 식견이 뛰어났다. 효도와 우애가 훌륭하였으며, 좋은 행실이 순수하게 갖추어 있었다. 학술은 정밀하고 깊었으며, 지형하는 길이 바르고 말을 세운대로 행동하였다. 거동은 옛 가르침대로 따르고, 평상시에도 종일토록 단정한 몸가짐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문간과 방들은 청빈하다 못해 쓸쓸하였으며 명예롭고 화려한 곳에 나가기를 즐기지 않았다." 보은의 상현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금산의 성곡서원, 순창의 화산서원, 회덕의 숭현서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묘는 주안 탑산리(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동면 탑산리)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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