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온(1409∼14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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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조선초에 책 읽기를 즐겨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은 다 읽고 나서 남의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는데 책 주인들은 그에게 책 빌려 주기를 꺼려했다. 일단 그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돌려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책 읽는 습성은 괴팍해서 내용을 읽고 읽어서 외게 되면 그 책장은 찢어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남의 책을 빌려서도 한장씩 뜯어서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외고, 다 외면 버리니 책 한 권을 외면 한 권이, 열 권을 외면 열 권이 다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즐겨 빌려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 대학자요 정치가로 널리 알려진 신숙주에게 국왕이 준 「고문선(古文選)」이라는 책이 있었다. 신숙주가 대단히 아끼고 소중히 여겨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었다. 책을 알고 온 그가 하도 간청하기에 그것을 빌려 주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신숙주가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가보니 아뿔싸, 책을 한장 한장 뜯어서 벽에 발라 놓았는데 그것도 연기에 그을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인가?" 신숙주가 물으니, "내가 누워서 외우느라 그리하였네." 책을 읽음에 비장한 각오로 배수진을 쳐놓고 몰두하려는 그의 정신력이 엿보인다. 이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여 글공부를 하여 서거정, 강희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이가 곧 김수온(金守溫)이다. '괴애' 또는 '식우'가 그의 호인데 '식우'란 혹을 씻는다는 뜻으로 그의 목에 혹이 나서 글을 지으려면 반드시 손으로 혹을 쓰다듬는 버릇이 있어 붙여진 것이라 한다. 김수온은 1409년(태종 9)에 영동군 용산면 토용리 오얏골에서 태어났다. 4형제 중 셋째이다. 그의 일화에서도 보듯이 총명하거나 명석했다기보다는 무섭도록 노력하는 사람으로 29세 1438년(세종 20)에 진사가 되고 32세에 늦깎이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책의 인쇄와 글자 교정을 맡아하는 관직)로 있다가 곧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집현전의 학사가 되어 정인지를 비롯한 학사들과 「치평요람」을 편찬했다. 이 책은 중국역사와 우리나라 역사 중 정치·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임금·신화·백성들에게 권장하여 경계할 것들을 추려내어 후손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 것으로 1445년(세종 27)에 완성한, 세종이 정성을 기울여 편찬한 책이다. 한편 유성원 등 여러 문관·의관들과 더불어 모든 의술의 처방을 망라한 「의방유취」라 하는 의학책을 편찬하는데 참여했다. 유학자이면서 그는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서 불경에 밝았는데, 당시 불교를 숭상했던 왕실과 인연을 맺고 조선초기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기도 했으니, 37세 때인 1446년(세종 28) 부사직의 관직으로 있을 때는 석가의 족보책인 「석가보」를 다시 보관하고 수정하여 더욱 자세히 했으며, 세조 때엔 법화경·화엄경이 유교보다 훨씬 심오하다는 말까지 하면서 불교를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도 맏형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그의 맏형인 수성은 집현전 학사로 있다가 불교에 조예가 깊어 마침내는 스님이 되어 승명을 '신미'라고 한 사람으로 세종·세조 등 불교를 숭상하는 왕을 도와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간행했으며, 문종 때는 '혜각존자'라는 호까지 받았다. 그래서 김수온은 스님과 얽힌 일화가 많이 전한다. 그가 영천 군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왕의 비호를 받는 어떤 스님이 자신의 세력을 믿고 여러 고을을 시끄럽게 하기도 하고 지방의 수령들을 깔보아 업신여기는 등 갖은 못된 행동을 부리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런데 마침 그 스님이 영천 고을에 왔다. 그는 넌지시 스님과 내기를 걸었다. "나와 당신이 불교의 이치를 서로 토론하여 지는 사람은 지팡이로 마구 맞아도 때리는 사람을 원망 하지 말기로 합시다." 그러자 그 스님도 선뜻 좋다고 했다. 그가 먼저 거침없이 불경을 줄줄외며 밝은 지식과 능숙한 말솜씨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상대방 스님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답변은 커녕 그저 머리만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그의 위엄 앞에 질려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대뜸 문창호지가 바르르 떨도록 호령을 했다. "네 이놈 늙은 중놈이 불경도 모르면서 어찌 중생의 복리를 빈다고 떠들어 댈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는 지팡이로 사정없이 때리니 그 스님은 아픔을 참지 못하고 부리나케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세조가 그를 북경에 보내이 우리 나라에 없는 불경을 구해 오게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가 중국땅으로 들어가면서 하루는 '감로사'라는 절에서 자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절의 주지스님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스님으로서 김수온이 조선의 큰 학자라는 말을 듣고는 미리 지필묵을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절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니 벽에 묵화로 그려져 있는 매화가 보였다. 그는 곧 그 주지 스님이 준비해 둔 붓을 들어 문기둥에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조계종에서는 황매선사, 감로사는 흑매, 만약 빛깔을 가지고 본다면 반야는 아니로구나!" 하고 놀라며 뜰 아래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대접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1451년(문종 1)에 전농시소윤이 되고 세조대에 와서는 첨지중추원사, 성균관사예, 중추원부사, 한성부윤, 지중추원사,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특히 세조 1년엔 왕이 종신과 문무백관 100여 명을 불러 술을 내리며 즉석에서 글을 짓게 하는 이른바 임시 과거 형태인 '발영시'와 '등준시'를 보였는데 김수온이 모두 장원하여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상으로 백미 20석을 받는 등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로부터 문과와 무과의 장원에서 백미를 하사하는 관례가 비롯됐다고 한다. 그 후 호조판서를 거쳐 1468년(예종 즉위)에 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1471년(성종 2)엔 임금을 잘 받들고 정치를 잘한 신하에게 내린 좌리공신의 4등공신이 되어 영산부원군에 올랐다. 그는 학문과 문장을 게을리하지 않아 당시의 대학자 서거정, 강희맹 등과 문명을 다투었고, 4서5경의 구결을 정하였으며 중국의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국어 발전에 크게 힘썼다. 그의 저서로는 그의 호를 붙인 '식우집'이 있고 문집으로 '사리영웅기', '묘적사중창기', '회암사중창기', '도성암기', '보은사중창사액기', '중은암기', '상원사중창기', '원통암정관사중창기', '수다사상전기', '봉선사기', '원각국사비명', '낙산사범종명', '몽유도원도제문', '인성대장경발문'등이 있으며, 그가 친필로 엮은 '복천사사적'은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1481년 그가 73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성종은 '문평'이라는 시호와 그를 제사하는 부조묘를 내렸는데 원래는 종곡에 있던 것을 송시열이 보은읍 지산리 선학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유택은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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