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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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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1399∼1456)
내용        

1456년,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 자리를 빼앗긴 단종을 복위시키자는 계획이 발각되어 이른바 사육신이 처형되었다. 이 때 이 사건에 관련되어 처형됐으면서 사육신에 들지 못한 사람이 있어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문제를 밝히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논의한 끝에 마침내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여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가묘를 설치하게 된 사람이 있다. 바로 '김문기'이다.

김문기는 1399년(정종 1)에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찌나 효성이 지극했던지, 10세쯤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묘를 하였다고 하며, 자라서 도진무(도총관·군대를 총괄하는 으뜸벼슬) 벼슬에 올랐을 때 계모가 돌아가셨는데 그가,

"13세 때부터 계모의 손에 자랐으니 그 은혜를 갚을 길 없어 벼슬을 내놓겠다."

고 상소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고, 그가 태어난 이원의 백지리를 '효자동'이라고도 했다 한다.

1426년(세종 8)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기 시작, 1430년에 예문관 검열, 1436년 사간원 좌헌납이 되었다. 한림학사를 역임한 바도 있는데 이 때 그는 「태종실록」을 편찬하고 역대실록을 충주사고에 봉안하기도 했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인정을 받아 1445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는 박종우의 천거로 함길도 도진무(함길도 군대를 통괄하는 으뜸벼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고질병인 이질 때문에 군무에 오래 복무하지 못하고 1448년엔 겸지형조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이듬해(문종 1년)에 함길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는 안변, 정평 등지에 둔전을 실시하였다. 둔전이란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 군량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관청의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 아직 개간되지 않은 곳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하는 논과 밭을 말한다.

둔전의 실시로 그는 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지방 젊은 이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가 그곳을 떠난 후 그의 가르침을 받은 선우식 등 유생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해 영당(영정을 모신 사당)을 지어 생사(살아있는 사람의 사당)로 모시었으니 그가 얼마나 열성껏 그곳에서 유생들을 가르쳐 존경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원래 영당이란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영정(초상화)을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데 살아있는 사람의 영당을 지어놓고 그의 은혜에 보답코자 모신다는 것은 여간 드문 일이 아니다.

1453년(단종 1)에는 천추사(중국 황후나 황태자의 탄신을 축하하여 보내는 사신)로서 명나라에 가 능숙한 중국어로 외교 솜씨를 발휘하여 공을 세웠고, 그해 명나라로부터 돌아와서는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수양대군은 좌의정 김종서와 영의정 황보인 등이 반역을 꾀하였다는 구실로 죽이고 자기 동생인 안평대군과 우의정 정본을 귀양보냈다가 죽인 다음 자신이 영의정이 되어 정권을 잡는 정변이 일어났다. 그러자 어린 단종의 신변이 더욱 위태롭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문종(단종의 아버지)이 죽을때 김문기 등에게 어린 단종을 보필할 것을 간곡히 부탁한 일이 있기 때문에 이때부터 단종을 섬기는데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그러한 태도 때문에 수양대군의 편들로부터 김문기를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치듯 할즈음, 이징옥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의 내력은 이러하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김종서의 천거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이징옥은 아무런 잘못없이 자기가 파면당하자 어찌된 일인 줄을 모르고 새로 부임한 박호문에게 그 사유를 물어 비로소 한양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은 정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격분한 이징옥은 박호문을 죽인 후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가서 종성에 자리를 잡고 '대금황제'라 스스로 칭하고는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세력이 워낙 큰데다 예기치 않은 일이라서 조정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습의 길을 찾다가 이 난을 평정할 인물은 문무를 갖춘 김문기밖에 없다는 중론이 일어 도리어 그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지방의 군대를 통솔 지휘하는 종2품 관직·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되어 김문기가 나아가 난을 평정하니 그 공으로 그는 1445년(단종 3)에 공조판서겸 3군 도진무(군대의 좌익, 중군, 우익을 통틀어 통괄하는 으뜸관직)가 되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또 금성대군(세종의 6째아들·수양대군의 동생)이 반역을 꾀하였다는 구실을 붙여 왕자리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결국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되었다. 이에 김문기는 어떻게든지 단종을 복위시킬 결심을 하고 내외종간인 박팽년, 후배인 성삼문 등과 의논하여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마침 1456년(세조 2)에 명나라 사신이 오게 되었다. 이 때 사신의 환영 연회장에서 그들은 거사하기로 하고 연회장 안의 책임은 박팽년과 성삼문이 맡고 유응부, 성승, 박정은 세조를 죽이고, 자신은 밖에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군인을 동원하는 임무를 맡기로 계획을 짰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동지였던 김질이 고자질을 할 줄이야. 그들은 결국 실패하여 붙들리고 말았다. 잡혀온 그에게 세조가 물었다.

"판서까지 되어서 무엇이 부족하기에 반역을 꾀할 마음을 품었느냐, 너는 상왕(자리를 물려준 왕·단종)의 이름을 팔아 나라를 빼앗으려 한 것이 아니냐?"

김문기가 대답했다.

"진짜 역적은 누구이냐? 당신을 왕으로 대할 수 없으니 심문에 응할 수 없다."

고 하면서 그는 꼿꼿했다. 다른 사람들은 매에 못이겨 자백을 하여도 오직 김문기만은 7일간의 모진 고문에도 끝끝내 입을 다물고 굴복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결국 그는 맏아들인 당시 영월군수로 있던 김현석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뒷날 사람들은 그가 끝까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지 않고 입을 다문 채 굴복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숭고한 자세'라고 하면서 이로인해 죽을 사람들을 많이 살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 뒤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 중 여섯 사람의 절의를 들어 '사육신'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남효온이 쓴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1691년(숙종 17)에 이를 국가에서 인정하여 육신을 복관시키고, 이어 1731년(영조 7) 김문기도 복관시켜 충의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 뒤 1791년(정조 15) 그는 민신, 조극관 등과 함께 3중신(三重臣)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절의를 지키다 죽은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 되는 이유로 하여 내려진 칭호다.

이후 좌천성의 중직이 내려지고 부조묘(왕명으로 공훈 있는 신하의 위패를 영원토록 모시는 사당)와 충신 정려의 왕명이 내려졌으며, 출생지인 백지리에는 유허비각이 있고 동학사 숙모전, 영월 충신당, 영동 호계서원, 의성 덕양서원, 시흥 오정각, 금릉 섬계서원 등에서 제사를 지낸다.

앞에서도 말한 바, 1977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인정했으며 이듬해에는 서울특별시가 사육신 묘역에 그의 가묘를 모시고 의절사에 위패(모시는 신주의 이름을 적은 패)를 모셨다. 그의 호는 백촌(白村)이며, 생전에 마엄정(馬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기서 시를 읊으며 기백을 보였는데 「방백한시」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