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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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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1378∼1458)
내용    

비단의 물이라고 해서 이름한 금강이 맴도는 마을, 진달래 활활 타는 산골짝에선 뻐꾸기가 목이 쉬도록 봄을 노래하고 개암알 속살 속에 여름이 무르익으면 비단의 물을 거느린 앞뒤 절벽은 신부처럼 화사하게 단풍으로 단장하고 가을을 기다리는 곳.

여기가 충북의 남단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이다. 이 빼어난 산천경개에 사철흠뻑 젖어 들어 푸르른 하늘을 향해 가야금을 타고 흐르는 강물결에 맞춰 피리를 불며 유년기와 성장기에 예술혼을 마음껏 구가한 소년이 있다. 이 소년은 훗날 이 아름다운 고향의 바위틈에 고고하게 핀 난초의 자태를 못잊어 스스로 호를 '난계'라 짓는다. 그가 곧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박연이다. 자칫 우리는 난계를 큰 음악가로만 알기 쉽다. 이는 그가 이룩한 음악에 대한 공적이 너무도 뚜렷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은 그의 가려진 또 다른 면모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1378년 8월 20일(고려 우왕 4)에 출생한 난계는 12세에 '영동 향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유학공부를 시작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감동할 만큼 침착하고 사려가 깊은 소년으로서 학문에 전심전력하여 사서오경을 비롯해 제자백가어를 섭렵, 이치가 정연한 유학자의 소양을 갖춘다.

이로써 그는 28세에 생원,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이에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문학, 악학별좌, 관습도감사, 공조참의, 중추원사, 보문각제학, 예문각 대제학 등의 벼슬을 두루 거치면서 고려의 나쁜 풍습을 없애고 새 조선의 기풍을 세워나가는데 왕을 보필하여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또한 그의 효성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으니, 그가 어려서 부친을 여윈 것이 한이 되어 어머니를 더욱 지성으로 모셨다는 이야기와 21세에 내간을 당했을때에는 25세까지 시묘(묘 옆에 막을 짓고 지냄)을 했는데 이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는 기록이 「난계연보」 에 실려 있으며, 시묘살이를 할 때는 범이 계속 지켜주었다는 일화가 지금도 그의 고향 영동에 남아 있다.

이러한 난계는 학자요, 정치가요, 효자로서 충과 효를 다한 사람이다. 이는 효자라야 정치와 교육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니 당대의 음악가이며 음악이론가이고, 음악사사의 태두로서 난계의 출현은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할 수 있다.

박연의 명성이 길이 전해 오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그의 신묘한 음악성과 음악에 끼친 그의 헌신적 공로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리 불기를 즐겨 틈만 있으면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는데 비록 어린아이의 솜씨였지만 그 장단이나 가락이 제법 들을 만 하였다. 이렇게 아들이 피리를 좋아하는 것을 본 박연의 어머니는 그에게 버들피리 대신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구해 주었다. 그날부터 혼자 피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얼마 후에는 능숙하게 피리를 다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이 남다른 것을 알고 무척 흐뭇해 하였다. 그런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 때부터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피리로 달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저렇게 피리를 잘 불지?"
"글쎄 말이야, 이제 겨우 열두살밖에 안 된 아이가 재주도 좋지!"
"오늘도 죽은 제 엄마 무덤에 간 게로군."
"저 아이야말로 피리의 명수야."

그의 피리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재주를 칭찬했다.

난계의 맑은 인품과 음악에 대한 슬기는 이미 고향에서 피리로부터 길러졌거니와 소년시절 한양에 갔을 때 받았던 음악에의 감동과 충동은 더욱 음악에 정진하게 하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여관에 해당하는 객관(客館)에서 머물 때의 일이다. 고요하고 쓸쓸한 어느 날 잠 자리에 누워 있는데 어디선가 아련히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렇지 않아도 고향집과 부모님이 그리워 울적해져 있는 감성어린 어린 소년의 가슴속을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얼마나 도취해 있었던지 자신이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 소리가 다 끝나고도 한참만에야 알았다.

'도대체 저것이 무슨 음곡일까? 어디서 누가 부는 것일까?"

어린 난계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아 하인을 앞세우고 그 피리 소리가 나던 곳을 찾아가 보고서야 이곳이 음률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관청인 '장악원'인 것을 알았다. 이 새로운 세계를 목격하고 받은 감동과 충격은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가슴과 뇌리 속을 파고들어 음악을 마음속에 확고히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음악은 얼마나 신묘했던지 그가 산에 올라가 악기를 연주하던 산새들이 들어 그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고, 토끼와 너구리들은 한편에서 춤을 추곤 했다고 한다. 가히 그의 음악에 대한 경지가 어디에 이르러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난계가 임금께 주청한 39편의 상소문과 가훈 등을 엮어서 후손이 펴낸 「난계유고」를 보면 그가 작곡, 연주뿐 아니라 악기의 제작과 음악 이론에 대한 연구와 조율, 그리고 궁중 음악의 정립과 혁신 등 음악에 관계되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에 대한 모든 것이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 초 악률 사용법조차 없어질 것을 염려해서 세종 7년부터 12년까지 5년여에 걸쳐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여기에 악보의 법식과 악기의 그림을 실어 악서를 편찬한 일, 석경을 비롯하여 생포, 방향, 훈축, 토악, 대고, 영고, 뇌고, 노고, 죽독, 건고, 편종 등의 아악기를 악법에 맞게 제작한 일, 초하루날, 설날, 동지 때의 조회에는 아악만을 쓰자고 왕께 건의하고 조회 악기를 특별 제작하여 실행한 일, 또한 융안지악, 서안지악, 휴안지악, 문명지곡 등 새로운 회례아악을 제정하여 사용한 일, 그리고 종묘악 뿐만 아니라 사직, 다단, 적전, 선잠, 선농, 산천 등의 제사악도 옛 제도와 틀린 것을 찾아 정정한 일, 특히 악기 합주가 깨끗한 화음을 낼 수 있게 여러 악기를 조율하는 편경을 제작한 일은 박연의 업적 중 기릴 만한 것이었다. 편경은 모든음을 조율할 뿐만 아니라 편종과 함께 없어선 안될 악기로서 우리의 아악을 일본 아악과 구별하기도 하고, 그 이전 이후의 우리 음악과도 구별하는 기준으로서 아악에선 없어선 안될 악기인 것이다.

박연이 이렇듯 음악에서 큰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박연의 뛰어난 음악적 자질과 해박한 지식에서 말미암은 것이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세종대왕의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적극적인 뒷받침이 없었다면 그리고 시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조회아악을 만들고 싶다면서 박연에게 말한 다음과 같은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 사실이 잘나타나 있다.

"고래로 어떤 제도를 새로 창제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임금이 하고자 하면 신하가 반대를 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면 임금이 듣지 않는다. 설혹 상하 모두가 하고자 해도 시운이 불리할 때가 있다. 지금이야말로 나는 확고한 뜻을 정했고 나라에는 일이 없으니 마땅히 진력해서 그것을 이룩하도록 하라."

세종대왕이 세상을 떠나고 막내아들이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박연도 화를 입을 뻔했다. 그러나 3대에 걸쳐 나라에 세운 공이 인정되어 화를 면하니 그이 나이 80세였다. 그는 고향 고당리로 내려왔다. 그리고 1년 후 세조 4년인 1458년 3월 23일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1972년에 사당인 '난계사'가 고향 고당리에 세워져 76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1965년부터는 '난계예술제'가 영동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는가 하면, '난계국악당'도 건립되고, 후진양성을 위한 '난계국악단'을 창설하여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