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1352∼14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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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와 조선 양조의 문신이면서 대학자였던 권근은 1352년(공민왕 1년)에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으나 그의 묘는 충북의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농안에 있다. 묘소 앞에는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이개가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있는데 이것은 1447년(세종 29)에 세워진 것으로써 높이가 218cm, 폭이 116cm의 대리석이다. 그 규모나 품위로 볼진대 능히 당대의 큰 인물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의 호는 '양촌'인데 양촌은 지금의 충북 충주시 소태면으로, 그가 한때는 귀양살이 끝에 이곳이야말로 가히 머물러 의지할 곳이로구나 하고 와서 살았던 곳이니 충북과의 인연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본다. 권근도 어려서부터 글 읽기에 게으르지 않고 꾸준했다 한다. 그리하여 17세에 벌써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엔 과거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국가의 시정을 기록하는 관직·사관)을 시작으로 성균관 직강(성균관에 속한 정5품), 예문관 응교(제도와 글을 담당하는 관직)등을 역임하였다. 이때의 왕은 공민왕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아기를 낳다가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승려인 신돈에게 나라 일을 맡겼는데, 신돈은 야심을 품고 횡포를 부리더니 마침내는 왕자리 까지 탐내는 무례함을 보여 공민왕 20년에 쫓겨나 죽음을 당했다. 그때까지 공민왕 에게는 왕의 자리를 이을 후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돈의 비첩인 반야를 사랑 하면서 그녀의 아들 즉 신돈의 아들인 모니노를 '우'라고 이름을 고치고 부원대군에 봉하여 뒤를 잇게 하고자 했었는데 왕의 자리에 오른 지 23년 만에 시해를 당한다. 공민왕이 죽자 우에게 과연 왕 자리를 잇게 하느냐 하는 문제로 대신들이 티격태격 의견의 대립을 보였다. 그것은 우가 신돈의 아들로 왕씨의 성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우는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시기에 권근은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운동에 앞장섰으며 우왕의 뒤를 이은 창왕 1년에 동지공거라는 관직에 올랐고, 이듬해인 1389년(창왕 2)엔 첨서밀직사사가 되어 그해 유월 문하평리 윤승순과 함께, 고려와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창왕의 표문(왕의 서한)을 가지고 명나라에 갔으나 명나라의 냉랭한 태도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예부 자문이 말썽의 씨앗이 되어 그는 일생일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자문이란 중국과 주고받던 나라의 문서인데 그 자문을 도당(최고 관청인 의정부)에 올리기 전에 미리 뜯어 보고 당시 임금의 사위이며 좌의정으로 있던 이림에게 먼저 보였던 것이다. 그 내용인 즉 왕씨가 아닌 다른 성으로 왕을 삼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명나라가 문책했다는 것이었다. 즉 우를 왕으로 옹립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우의정으로 있던 이성계에게 들어가고 이성계는 권근을 불러 사실 여부를 물었으나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다가 창왕의 뒤를 이어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 일이 들통나고 말았다. 대간(사헌부, 사간원)에서 권근이 자문을 미리 뜯어 보고 이림에게 먼저 보였다는 사실을 탄핵한 것이다. 이리하여 권근은 극형을 당할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무의 권력을 잡고 있던 이성계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극형은 면하고 우봉으로 유배된다. 이에 영해, 홍해, 김해 등지로 옮겨가며 귀양살이를 하다가 1390년(공양왕 2)엔 청주옥에 갇히는데 마침 이 무렵 청주에 대홍수가 일어나는 바람에 일단 풀려나 한양으로 왔고 다시 곧 익주에 유배되었다가 여기서 비로소 석방된다. 3년만의 일이다. 권근은 이렇게 귀양살이 옥살이중에서도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가다듬고 많은 유학을 공부하려는 후진들을 교육했고 책을 저술하는데 힘썼다. 그의 유명한 「입학도설」이라는 책은 아주 귀양살이 때 쓴 것으로서 뒷날 이황 등 여러 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이듬해 그는 조용히 살 요량으로 충주땅인 지금의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에 와서 자리를 잡았는데 이때 그의 높은 학문을 듣고 찾아드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젊은 후진들 교육에 전념을 다했다. 그의 유명한 또 하나의 저서인 「천견록」은 바로 이 시절에 지은 것이며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양촌'이라는 그의 호도 이 양촌마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권근은 1392년(공양왕 4) 이 충주땅 양촌에서 조선 왕조의 건국을 맞는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태조인 이성계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로 달려간다. 여기서 그는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올리고 왕명을 받아 태조의 아버지 환조의 묘인 정릉의 비문을 지어 바쳤다. 이로부터 그는 새 왕조의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하여 예문관 대학사, 중추원사에 올랐으며 개국공신교서를 짓는 등 새 왕조에 충성했다. 1396년(태조 5)에 이른바 표전(왕가의 서한) 문제가 일어났다. 신년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로 표전을 보냈는데 여기에 명나라를 업신여기는 내용이 있다하여 화가 난 명이 표전문을 쓴 정도전을 죽이려고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사람을 보내고 극구 변명하여 사죄했으나 명은 막무가내로 정도전을 보내라 고집하였다. 이에 권근이 자진하여 가겠다고 나섰다. 표전을 지을 때 자기도 함께 참여하였기 때문에 가서 변명을 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태조는 소용없다고 말렸으나 권근의 청이 간곡하여 허락했다. 권근은 명나라 황제 앞에 갔다. "서로 나라가 달라 배운 것이 같지 못하여 우리의 충성을 명백하게 표현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잘못이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하고 간곡히 변명하니 그제야 명 황제는 옳다하고 노기를 푸는 것이었다. 그의 높은 학문과 문장을 인정한 명 황제가 그에게 직접 시제를 주어 부탁하자 그는 거리낌 없이 24편의 시를 지어 바쳤다. 이에 감탄하여 그를 특별 대접하니 명의 대신·학자들도 그를 우러러 마지 않으며 존경의 예우를 표시했고 함께 학문과 문장을 강론했다. 이리하여 권근의 외교는 크게 성공하였으니 서먹서먹했던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충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변은 불안했다. 이색의 밑에서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이숭인 등과 더불어 같이 수학했던 정도전이 그를 시기하고, 개국공신들이 억압하고 탄핵을 하는 등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불안을 떨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개국공신의 대열에 들어가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진정서를 올려 마침내 개국원종공신에 오르게 되고 화산군에 봉해진다. 그러면서 정도전이 1398년 태조 7년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에게 죽자 그는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르게 된다. 이로부터 정치와 학문의 주도권을 잡고 소신대로 유교 국가를 만드는 일에 앞장섰고 정종이 즉위하면서 정당문학, 참찬문하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왕권의 확립을 위해 사병제도를 없애는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에 좌명공신이 되어 길창군에 봉해졌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즉위하여 사신 둘을 조선으로 보내 왔는데 태종이 이들에게 위로연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권근이 술잔을 들자 사신들이 모두 일어났다. 태종이 연유를 물으니 그들은 "어떻게 감히 노성한 군자를 몰라보겠습니까?" 하였다 한다. 1403년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표했는데 태종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1405년엔 의정부 찬성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또 유학제조가 되어 유학강론에 힘썼다. 1407년에 최초의 문과 독권관이 되어 변계량 등의 학자 10인을 뽑는 한편 왕명을 받아 사서오경의 구결을 지어 정하고,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는가 하면 학문을 권장하는 목록인 「권학사목」을 지어 올리는 등 당시의 여러가지 문교시책을 개정하고 보완했다. 그는 위에서 말한 저서 이 외에도 「양촌집」과 작품으로 「상대별곡」을 남기고 그의 나이 쉰 여덟인 1409년(태종 9)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라에서 3일간 나라일을 중단하고 조의를 표했으며 '문충'이란 시호를 하사했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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