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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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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1337∼1398)
내용   인물 이미지 없음  

충북 단양군 매포읍 도담리를 가로지르고 흐르는 남한강 한가운데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제일 큰 가운데 봉우리가 남봉, 왼편 봉우리가 첩봉, 오른편 봉우리가 처봉이다. 처봉은 남봉에게 등을 돌리고 토라져 있고 첩봉은 불룩한 배를 내밀고 남봉을 향해 애교를 띠고 앉아 있다. 이것이 단양의 명물 '도담상봉'이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게 아니라고 전한다. 고려 중엽에 큰 장마가 있었는데 강원도 정선 땅에 있던 세 개의 산봉우리가 장마에 떠밀려 내려오다 여기에서 물이 빠지는 바람에 그대로 서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원도 정선의 것이다. 그래서 정선 관아에서는 실종된 이 세 봉우리를 찾아다니다 마침내 도담에서 발견하게 됐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원래 삼봉은 강원도 땅이었으니 이 동네 사람들은 마땅히 강원도에 세금을 바쳐야 된다고 억지를 썼다. 동네 사람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매년 세금을 냈고, 이러기를 몇십 년 계속하다가 분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세금을 안 낼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별 뾰족한 묘안이 서지 않자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때 6∼7세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이 어른들 앞에 나서더니

"좋은 방법이 있으니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하지 않는가?

얼마 후 강원도에서 세금을 받으러 왔다. 이 때 그 소년이 당당히 앞에 나서더니

"올해부터는 지세를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는 거였다. 관리들이 깜짝 놀랐다. 그 소년의 말하는 태도는 어린 아이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다.

"삼봉이 강원도에서 떠내려와 이곳에 머문 것은 이곳에서 오라고 한 것도 아니요 제 멋대로 온 것이니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입니다. 그러니 세금을 낼 까닭이 없습니다. 삼봉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면 강원도로 도로 가지고 가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강원도로 가져가서 그 곳에서 세금을 걷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그 어린 소년이 조목조목 짚어 가며 어른처럼 대답하는 것이었다. 강원도 관리는 아무말도 못하고 돌아갔고 그때부터 이 동네 어른들은 삼봉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바로 이 소년이 후에 조선조의 개국공신이 된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도담삼봉과 바로 이웃한 단양군 매포읍 도전리에서 출생했을 뿐만 아니라 파란많은 외지생활을 하다가 늙으막에 단양에 와 은거할 때도 도담삼봉을 즐겨 찾아 노닐었으니 삼봉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여서 자신의 호까지 아주 '삼봉'이라 하였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 대에 이르러 비로서 형부상서(법률·소송·형벌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리)라는 중앙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을 뿐이며, 정도전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노약한 노비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인데다 오랫동안의 유배·유랑생활로 하여 곤궁한 지경의 연속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읽어 아는 것이 많고 논리가 정연했으며 도량이 크고 호탕한 기상을 갖추어 혁명가적인 소질을 지녔다 한다.

마침 그의 아버지와 당시 대학자였던 목은 이색의 아버지와 교우관계가 있어 이색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문장에 능하고 성리하가에 밝아서 같이 수학한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윤소종 등이 그에게 앞자리를 양보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1362년 공민왕 11년에 진사시 합격으로 충주사록이 되면서 이어 조회의 의례를 맡아 보는 관직인 통례문지후까지 오르나 연이은 부모상을 당하여 벼슬을 내놓고 3년상을 치르고는, 5년여 동안 선대의 고향인 경북 영주와 단양의 삼봉을 오가며 학문과 후배교육에 힘쓰다가 공민왕 19년에 성균관박사에 임명되어 정몽주 등과 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강독하였으며, 5년동안 인물을 전형하여 뽑는 일을 관장하였다.

그때는 고려를 지배했던 원나라가 쇠해지고 명나라가 일어나는 시기로 이때를 틈타 고려는 원나라에서 벗어나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개혁정치를 펴기 위해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가까이 하는 배원친명정책이 일고 있었는데, 정도전이 그 주세력이었다. 그리하여 구세력인 친원배명세력과 마찰이 잦았다. 그러던 차 1375년 우왕1년에 원나라 사신이 고려로 들어오는 일이 있었는데 이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구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으로 유배됐다. 2년 만에 풀려나 4년간 영주에서 지내다가 삼각산 밑에 '삼봉재'라는 초가를 짓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런데 이것이 좋은 평판을 얻게 되자 그 곳 출신의 재상이 이를 시기하여 그는 삼봉재를 철거하고 부평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왕씨 성을 가진 재상의 방해로 다시 김포로 옮긴다. 이렇듯 유배, 유랑생활 8년은 수모와 곤궁에 시달리는 세월이었다.

그가 청장년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입으로 나라 안이 어수선하였고, 또한 구세력의 횡포로 정치가 어지러워 민생이 궁핍하였다. 이런 시기의 유배, 유랑생활은 그에게 애국과 애민의 생각을 깊게 하는 동시에 정치적 개혁의지를 싹트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그가 이상으로 하는 개혁적인 정치제도란 재상을 최고의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따로 분리된 합리적인 관료의 지배체제로서 그 통치권은 백성을 위하는 일에만 행사해야 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는 이른바 역성혁명론은 그 민본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그는 실제로 이 혁명이론에 입각해서 고려왕조를 조선왕조로 교체하는 일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혁명을 위해 이성계와 손을 잡는다. 당시 이성계는 자신을 반대하는 집권층이 아닌데다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쳐 안팎으로 신망을 받고 있고, 잘 훈련된 군사를 지휘하고 있어 언젠가는 정계에 등장할 수 있는 유망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참모 노릇을 하면서 시조 한 수를 지어 은근히 마음을 떠 보았다.

창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청산에 자라서 몇 만 겹이라
다른 해 서로 만나 뵐 수 있으리까
사람 사는 서리에서 곧 따라 좆으리다.

이 시조를 듣고 이성계는 한 편이 될 것을 다짐했다 한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1388년 6월)으로 우왕과 최영 등의 친원세력을 내쫓고 실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과 함께 그간 집권층의 반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전제 및 군제의 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해서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는 한편 불교를 배척하는 이른바 척불론을 주장했다. 당시 불교는 사회·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도 컸으나 국가와 사회에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기에 이를 내세워 불교의 비합리성을 비판·공격하고 유교만이 실질적으로 바르다는 이론을 내세워 이른바 숭유억불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렇게 이성계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 가면서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기도 하고,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도 하여 마침내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잡았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정몽주 일파의 탄핵을 받아 지금의 예천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풀려나 마침내 1392년 조준, 배극렴 등 50여 명과 함께 공양왕을 몰아 내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왕조를 건국하기에 이르른다.

개국 일등공신이 된 그는 한양천도를 계획, 실천하고 궁궐의 위치 및 한양성의 시가지를 정비하는가 하면, 경복궁을 비롯한 각 궁문의 칭호와 8대문의 이름까지도 제정하는 등 조선 건국 초창기의 일을 계획대로 착착 실천해 나갔다.

그런데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가 일어났다. 표전이란 왕가의 서한을 말하는데 신년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로 보낸 표전에 명나라를 업신여기는 문구가 있다하여 명이 이를 트집잡아 이를 쓴 정도전을 죽이려 했으나 권근이 자진하여 가서 잘 처리하고 돌아왔다. 이듬해엔 또 명나라에 보낸 계본(왕에게 보내는 문서) 가운데 명을 업신여기는 문구가 있다면서 이를 쓴 유순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에 격분한 정도전은 전부터 추진해온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이는 명에 대한 일시적인 감정에서가 아니라 명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에서 당당히 벗어나려는 독립정신의 발로에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요동 정벌계획이 실천으로 옮겨지기 전에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그가 세자 방석과 함께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고 하는 죄명으로 이방원의 습격을 받아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그의 나이 61세인 1398년 태조 7년 때이다.

사상가, 유학자, 정치가,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를 겸비했던 정도전의 저서로는 「삼봉집」「경제육전」「경제문감」 「심기이편」「불씨잡변」「심간전답」「진법서」「금남잡제」등이 전해지고 5권의 악사와 그 외에도 병법서 몇권의 의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