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1270) | |
내용 |
![]() 고려가 몽고의 잦은 침입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였다. 당시 고려 조정을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대장군 송언상이 고향인 진천 땅에 내려오다가 때마침 아이들이 병정놀이 하는 것을 보고 발길을 멈추었다. 처음엔 잠시 구경만 하고 지나치려 했던 것인데 병정놀이 치곤 너무도 실감나고 특히 대장 격인 승주라는 소년의 특이한 생김새며 통솔력에 이끌려 자리를 뜨지 못했다. 승주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 중에서 키나 몸집이 유달리 장대하고 힘이 세어 대들보 만한 통나무며 기왓장을 지붕 너머로 휙휙 던지는가 하면 땅에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며 몸을 엎드려 설설설 팔로 기기도하고, 훌렁훌렁 땅재주를 넘는데 그 몸놀림이 팔랑개비처럼 여간 날렵한게 아니었다. 게다가 툭 튀어나온 두 눈에선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고 고함소리는 마치 늑대나 호랑이의 포효처럼 우렁찼다. 송인상은 그 자리에서 승주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승주 소년의 부모와 상의하여 개경의 자기 집으로 데려가 슬하에 두고 학문과 무예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병들어 일찍 죽자 소년은 고향인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으로 내려온다. 이 승주 소년이 곧 뒤에 장성하여 몽고에 목숨이 다 하도록 항거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을 크게 떨친 평민 출신의 임연(林衍)장군이다. 고향에 돌아온 승주는 홀로 학문과 무예를 닦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것은 그 무렵 고려는 벌써 몇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입을 받으면서 전 국토가 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조정이 강화도 로 피난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나라와 백성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종 21년(1234), 진천 지방에도 몽고군이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승주는 "나라가 위급함을 당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을 쓰지 않으면 어찌 대장부라 하리오." 라고 외치고 주위의 청년들을 모아 몽고군과의 대항에 나섰다. 먼저 10여명의 날쌘 젊은이를 뽑아 동호 (지금의 덕문이 방죽)로 보내 적군의 사정을 살펴보도록 했다. "차마 눈뜨고 못 볼 일들이 일어나고 있소. 부녀자들이 놈들에게 희롱을 당하고, 가축을 마구 도륙하고 남자들을 짐승 부리듯 하고 있습니다.", "놈들은 이겼다고 축배를 드는 모양인데 파수꾼까지 취하여 있습니다.", "놈들의 수효는 어림잡아 수백명은 돼 보이고 열다섯 곳으로 진을 치고 있는데 모두들 승리감에 도취하여 술과 아녀자 희롱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적의 정세를 살피고 온 사람들이 낱낱이 보고하며 울분을 토했다. "너희들의 성공 여하에 따라 오늘의 전투가 판가름날 것이다." 라고 결연히 말했다. 제2군에겐 몽고진영에 불이 붙으면 사방에 흩어져서 힘껏 징과 꽹과리를 울리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제3군에게는 제1,2군이 성공하면 그때 일시에 불화살을 쏘아 적의 말 먹이를 쌓아둔 곳간과 군량미 곳간을 불사르게 하고는 나머지 사람들과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불이야 불이야!" 뒤이어 징과 꽹과리 소리가 깊은 밤하늘의 적막을 부셔댄다. 승주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제3군을 향해 소리쳤다. "정확하게 쏘아라!" 그리곤 창과 칼과 농기구로 무장한 나머지 의병들을 독려하여 진영 안으로 진입시키고 자신은 파수병의 말을 빼앗아 타고는 적장의 진영으로 쫓아가 "적장은 나와라. 어서 칼을 받아라!" 하고 장검을 높이 휘둘렀다. 이에 적장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다가 불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예기치도 않았던 급작스런 의병의 습격을 받고 장수마저 잃은 몽고병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몽고의 무자비한 침략으로 속수무책인 고려가 온통 피해만 입고 있던 때 이 의병장 승주의 통쾌한 승리의 소문은 강화도로 피난 가 있던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이때는 무신이 집권하던 때로서 최항이 실권을 잡고 있었고 그의 별장으로 있는 김준 또한 세도를 부리고 있었는데 이 김준이 승주를 불러 올려 공적 을 치하하고 지금의 중대장급에 해당하는 대정이란 관직을 주면서 "승주라는 이름은 어릴 적의 이름이니 대정의 이름으로는 걸맞지 않는다. 이미 널리 그 이름을 떨쳤으니 이제부터는 '연'이라 이름하도록 하라." 했다. 이때부터 성씨 임과 더불어 '임연'이라 불렀다. 이로써 최씨의 무단정치가 사라졌는가 했는데 이번엔 김준이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고종이 죽고 원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임금을 제쳐놓고 세도를 부려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것이었다. 오히려 최씨 무단정치 때보다도 더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김준의 횡포를 보다 못한 원종 임금이 임장군을 불러 올려 김준을 제거해 줄 것을 당부하기에 이른다. 임장군은 며칠 밤낮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고민했다. 수양아버지일지언정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더구나 자신을 출세시켜 준 은인인 것이다. 그러나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사사로운 정에 끌려드는 것은 옳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동안의 김준의 횡포가 너무 크다는 결론을 내리고 최은과 김경을 시켜 그와 그 일당을 제거하여 마침내 왕권을 회복시켰다. 이로 인하여 장군은 일약 국가의 대권을 잡게 되고 다시 진천은 군으로 승격, 의령군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일어났다. 최은과 김경이 자신들의 공을 내세워 권세를 키워가면서 나라 일에 깊이 관여하더니 급기야는 정권욕에 사로잡혀 걸림돌이 되는 임장군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이었다. 조정이 이에 안정을 찾으니 이번엔 몽고와의 문제가 일어났다. 그간 몽고는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고려에 강요하고 있었는데 원종 임금은 압력에 못이겨 개경 환도를 계획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장군은 "지금 우리가 그들의 강요에 굴복하면 우리는 영원히 그들의 속국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군대 를 양성하여 그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하고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마음 약한 원종은 오히려 임장군을 걸림돌로 여기고 장군을 제거하려 하니 장군은 할 수 없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왕의 동생인 창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별정도감이 되어 실권을 잡았다. 그의 후손 상산 임씨 문중에서 고향인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에 숭모비(1979), 장열사(1988), 사적비(1991)등을 세워 그 공적을 기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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