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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충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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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
내용

신라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자 당나라에서 축하의 뜻으로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사신편에 국서라고 하는 서류를 보냈는데 그 내용에 어려운 대목이 있어 왕 이하 대신들이 이를 풀지 못해 난처해 하고 있었다. 당에서는 고의로 국서를 보낼 때는 상대국을 얕보고 골탕을 먹이려고 이런 수법을 써오는 터였다. 그리하여 수소문 끝에 대가야 출신으로 유학을 하여 학문이 높다는 무명의 학자 한 사람을 불러 풀게 하니 그는 한번 보고는 서슴지않고 그 어려운 구절을 쉽게 해석하여 설명했다. 왕이 감탄해 마지 않으며 그 이름을 물었다.

"신은 본래 임나가라(대가야) 사람으로 이름은 자두라고 합니다."

그가 대답하자 왕이 그의 머리 뒤에 뼈가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우습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그대의 두개골을 보니 가히’강수선생’이라고 할 만하다."

하고 껄껄 웃었다. 강수란 한자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강하고 굳센 머리’라는 뜻으로 뿔같이 돋친 그의 외형상의 머리모양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학문을 따를 수 없는 강한 우두머리’라는 또 다른 뜻을 지니기도 한다. 바로 이 사람이 통일 신라 의 유학자요 대 문장가인 강수선생이다. 강수는 중원 소경, 즉 지금의 충주 출신이다.

본래 그의 선대는 대가야 사람인데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신라가 가야의 귀족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써서 중원경으로 오게 되는 바람에 그는 여기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 머리에 뿔이 돋친 사람을 보고 잉태를 했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꿈에 보았던 사람처럼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솟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이 아버지는 놀라면서도 신기하고 이상해서 아이를 데리고 인근에 있는 현자를 찾아가 물어보았다.

"중국의 천지 창조 신화를 보면, 그물을 발명해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 최고의 제왕으로 알려져 있는 복희씨는 그의 어머니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낳았는데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 을 하고 소의 머리에 호랑이 꼬리를 한 호랑이형이었다고 하고, 황토를 빚어 인간을 만들었 다고하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인 여와는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하고 있었다 하며, 농업의 신이라고 하는 신농씨는 소의 머리형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성천자인 순왕의 어진 신하였던 고도는 입이 말의 입 같았다니 흉되거나 걱정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뛰어난 인물이 될 터이니 잘 기르도록 하라."

하여 집으로 데리고 와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정성을 들여 양육하였다.
아니나다를까 강수는 성장하면서 머리에 불쑥 솟은 뿔처럼 글 공부에 뛰어 난 면을 보였다. 어느 누가 글 공부를 하라고도 하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글을 터득하고 학문연마에 정진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그 부친이 자식의 뜻을 알아보려고

"너는 불도를 배우려느냐, 유도(儒道)를 배우려느냐?"

하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당시의 신라는 불교를 숭상하던 때인지라 유교는 그 힘이 사회적으로 미약했다. 그리하여 그 부친은 은근히 불법 공부에 기대를 걸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강수의 대답은 의외였다.

"제가 듣기로는 불도는 세외교(世外敎)라고 합니다. 저는 속세의 사람이온데 어찌 세상 밖, 곧 속세를 떠나 있는 불도를 배우겠습니까, 유자의 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하고 여쭈었다.
이는 자신의 집안이 멸망한 대가야 출신으로서 당시 신라의 골품제 하에서는 불도에 뜻을 둔다해도 더 이상의 신분 보장은 불가능한 사회적 배경과 자신이 살고 있는 중원경 (충주)의 문화적 분위기가 유교쪽으로 젖어있어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었나 한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거리낌없는 대답에

"그러하다면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라."

하고 아들의 뜻에 맡겼다.
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한 강수는 스스로 스승을 찾아 나섰다. 주로 부모를 잘 섬기는 공경을 가르치는 효경, 예의 범절을 가르치는 곡례, 교훈적인 문자나 문장을 가르치는 이아, 시부·문장·고시·고악부를 망라한 문선 등 실천 도덕적인 분야에 힘썼다. 그러니 자연 유학자로서보다는 문장가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되고 마침내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나라 국서 풀이로 ’강수 선생’이란 새 이름까지 붙여준 태종 무열옹은 그가 당나라로 보낼 답서까지 훌륭하게 지어 올리자 크게 기뻐하면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고는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임생이라고만 부를 정도였다. 그 뒤 당나라와 고구려, 백제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부 그가 도맡게 되었는데, 특히 강수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당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글을 써서 당의 파병을 얻어내어 고구려, 백제를 평정하는 데 물꼬를 텄다. 이 일에 대하여 훗날 태종의 뒤를 이은 문무왕은,

"우리 선왕 태종이 당에 원병을 청하여 고구려,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무공이라고 할지라도 또한 원병을 청하는 강수의 문장이 큰 도움을 주었으니 강수의 공로를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하고 강수의 공을 높이 치하하면서 사찬(제8품)의 벼슬을 주고 세조 2백석을 내렸다. 또한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으나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옛땅에 도호부를 두고 통치하려고 하자 문무왕이 당군을 몰아내고 완전 통일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대항했는데 이에 당은 당시 당에 머물고 있던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을 옥에 가두고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이 때에도 강수는 왕의 명을 받고 석방을 청하는 ’청방인문표’라는 표문을 설득력 있게 지어 보냈고 이것을 받아 본 당의 고종은 그 구구절절이 담긴 내용에 감명을 받고는 눈물을 흘리며 석방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의 도호로 부임한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고구려 땅을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고 신라까지도 1개의 주로 여겨 계림도독부를 두어 문무왕을 도독으로 임명하는 등 신라의 자주권을 무시하자 강수는 설인귀에게 보내는 ’문무왕답설인귀’라는 답서를 지어 설인귀의 기를 꺽기도 했다.

그는 20세에 결혼했다. 그의 결혼은 파격적이었다. 자기보다 신분이 천한 부곡에 사는 대장장이의 딸과 혼인을 하고자 했다. 부모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명성이며 그 지위라면 얼마든지 지체 높은 가문의 어엿한 딸과 혼사를 맺을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불도를 버리고 유도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본인의 의사에 따라 허락했던 그의 부모도 이번에는 달랐다.

"너는 지금 이름을 떨쳐 이 나라에서는 너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지체 또한 그 집안과는 다른데 그런 천한 사람과 짝을 맺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냐, 생각을 깊이 하라."

하고 꾸짖기도 했다. 그러나 강수의 결심은 단호했다.

"가난하고 또 천한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옵고 학문을 배워 이를 행하지 않는 것 이 진정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무리 천한 여자라고 하나 차마 버리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자신의 뜻을 여쭈었다. 강수가 이렇게 여자의 신분이 천함에도 불구하고 아내로 택하게 된 것은 당시 신라 사회의 윤리관에 새로운 개혁을 제시해 보이는 것이었으며, 신라의 전통적인 윤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이고 나아가 골품제에 입각한 신라의 신분제에 대한 저항의 기질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유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들어 실행하는 유학자요, 도덕자다운 선비기질에서 연유하고 있다.
이렇듯 그는 신라 사회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자기 스스로 자신을 명확하게 판단 하여 유학·문장학으로 진출, 마침내 성공한 지식층으로 사회사적으로나 사상사적으로나 뚜렷한 발자 취를 남긴 걸출한 인물이다.

그는 재물에 뜻을 두지 않아 늘 가난하게 지냈다. 이를 알고 태종 무열왕이 나라의 살림을 맡아 보는 곳인 유사에 명하여 해마다 창고에 있는 조1백석을 하사하고, 또 공을 세울 때마다 특별 하사미를 주었지만, 모으는 일이 없이 두루 나누어 먹었다.
그는 태종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등 3대에 걸쳐 문신으로 보필하다 692년 신문왕 때 세상을 하직했다. 대학자의 별세에 왕은 그 벼슬에 따라 후하게 장사를 지내 주고 유족에게 부조의 뜻으로 많은 물품을 하사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모두 남편의 명복을 비는 불사에 쓰고 가난하게 살았다. 이 사실이 왕의 귀에 들어가자 이를 가상히 여겨 또 다시 조 1백석을 하사했으나 그의 아내는

"이미 나라의 은혜를 입은 바 많은데 어찌 또 이렇듯 후한 물품을 받겠습니까?"

하며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과연 그 남편에 그 아내라 할 수 있으니, 강수가 일찍이 사람됨을 알고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기필코 맞아들인 아내다운 훌륭한 태도인 것이다.
강수가 떠난 지 1천년이 지난 지금 충주에서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우륵 문화제 때 추모제를 곁들여 지내고 ’강수 백일장’도 열어 대문장가를 기리고 있다.